어두웠던 일제강점기. 그 시절, 한 여자가 있었다. 또래보다 한 뼘은 훌쩍 큰 키에 당시로선 장대한 기골을 자랑하는, 담배 한 대 장쾌하게 물고는 남자들에게 거침없이 육두문자도 날린다. 여자나이 스물이면 아이나 키워야 했던 그 시대에, 식민지 조선 출신의 그 여인은 혈혈단신 일본에 건너와 당대 최고의 비행사가 된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룬 여인의 얼굴에 왠지 모를 그늘이 있다. 여류비행사 박경원. 그녀가 영화 ‘청연’으로 부활한다. 29일 개봉하는 영화 ‘청연’은 올해 극장가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그래서 픽션을 넘어서는 실화의 힘을 자랑하는 영화다. 소재는 관객을 충분히 자극시킨다.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최초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영화는 최초의 ‘민간’ 여류비행사로 설명한다) 여자라면 밥이나 하고 애나 키워야 했던 시대에 혼자 힘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이뤘던 여인. 그러나 결코 ‘영웅’은 될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일 수도 혹은 기회주의자였을 수도 있는 그 여자 박경원의 삶을 그려낸다. #그 여자 박경원, 하늘을 날다.
어린 시절, 박경원(장진영)은 하늘을 본다. 그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언젠가 자신도 하늘을 날 거라고 다짐한다. 그 순간은 잠시다. 영화는 그녀가 겪었을 어린 시절 온갖 고난과 장애를 건너뛰고, 이미 일본의 비행학교에 입학하는 시점에서 테이프를 끊는다. 영화 속 박경원은 이미 훌륭한 여류조종사가 돼 있다. 신문에 이름도 나고, 기사를 읽고 자신을 우상으로 삼아 온 후배도 맞이한다. 아르바이트로 택시 운전사를 하며 만나게 된 남자 지혁과 사랑도 일궈 나간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도 받지만, 이내 비행 실력 하나로 동료들과 멋진 관계를 일궈 나간다. 모든 걸 가진 박경원.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행복은 신기루처럼 날아간다. 사랑하는 연인은 결혼을 하자고 조르지만, 하늘을 날아야 하는 그녀는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 조종사로서만 남기에 세월은 너무 하수상하다. 만주로, 유럽으로, 세상 끝까지 날아가고 싶지만, 돈과 조국이 그녀를 가로막는다. ‘그녀의 법적 조국’ 일본은 말한다. 만주까지 가고 싶으면 일본의 영광을 선전하라고. 그녀는 선택한다. 일장기를 들고, 일본의 영광을 말하며 자신의 비행기 ‘청연’을 타고 마지막 비행에 나선다. #그 여자 박경원, 하늘밖에 없다.
개봉을 앞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박경원의 친일파 논쟁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영화는 그녀에게 독립운동가의 모습도, 자랑스런 대한의 딸 이미지도 덧씌우지 않는다. 경원의 남자, 지혁의 말로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꿈을 이루라. 박경원이 비행밖에 몰랐지, 언제 조국 때문에 고민했나. 조선이 네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박경원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거의 없었기에 영화는 발휘할 수 있는 상상력을 최대한 보여준다. 박경원과 지혁의 로맨스는 딱딱하기만 할 뻔 했던 실화 장르에 대중적인 코드로 등장한다. 독립투사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녀의 인간 그 자체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데 충실한다. 비행자금을 모으기 위한 후원회가 잇따라 실패하지만 촌스럽게 ‘조국’을 되뇌이진 않는다. 그녀의 남자 지혁은 친일파의 아들이지만, 그들의 사랑에 그 어떤 장치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영화가 그리는 박경원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여자의 삶. 조국도, 사랑도, 그녀에겐 없었다. 영화만 놓고 본다면, 내내 등장하는 비행 장면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일제시대 비행기였던 ‘복엽기’를 복원해 만들어 낸 고공비행 장면은 2005년 우리나라의 영화 촬영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실감하게 만든다. 중간 중간 컴퓨터 그래픽 장면과 실제비행 장면이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게 거슬리긴 하지만, 실감나는 영상을 만들어냈다는 것 하나만으로 비행신의 의미는 남다르다. ‘쿨’할 것 같았던 영화가 중반 이후 갑작스레 조국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극적 흐름이 다소 헐거워지는 아쉬움도 보인다. 도입부분, 박경원의 힘겨웠던 시절을 보여주지 않은 건 다분히 감독의 설정이겠지만, 국내 관객에겐 다소 생소한 시간기법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가장 큰 난관은 역시 흥행 여부. 영화 시작 1시간만 놓고 보면 지난해 개봉한 ‘역도산’의 여자 버전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닮은 점이 많다. 영상을 즐기기 위해 극장을 찾는 연말 관객에게 이런 묵직한 이야기가 먹힐지는 미지수다. 제작기간만 3년. 10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 문제로 여러 차례 엎어지기도 했다. 그 고생담으로 영화를 홍보하기엔 극장엔 화려한 작품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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