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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73.도서정가제의 중요성
입력2003-09-30 00:00:00
수정
2003.09.30 00:00:00
이규진 기자
오랫동안 잘 유지돼 오던 도서정가제(재판매가격제유지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접어 들면서부터였다. 인터넷 서점이 등장하고 대형 할인점들이 속속 문을 열면서 도서의 할인판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진 탓이었다. 무엇이든 값싸게 대량 매입하여 싸게 판매하는 할인점의 등장에 대하여 소비자들은 모두들 환영할 터였다.
그러나 서적만큼은 문화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세계의 많은 나라가 정가 판매제를 고수해 왔고 우리나라도 이에 속했다. 책만큼은 콩나물이며 공산품 흥정하듯 소비자가 `깎아 달라`는 요구에 기분내키는 대로 깎아 주는 상품이 아니라 나온 지 1개월이 됐든 1년이 됐든 동일한 고유의 가치를 지니는 특별한 상품으로서 정가판매를 해야 된다는 정서였다.
내가 출협 회장이 되던 96년에는 그러한 도서정가제의 인식이 자율시장경제의 논리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분위기였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재고도서나 잡지 등 일부 도서에 대해 도서정가제의 폐지를 거론하며 향후 일반도서도 적용할 방침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출판계는 물론이고 서점계에 비상이 걸렸다.
출판사들 중에는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해 시위도 하고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일수록 논리적으로 조용히 풀어가는 것이 낫지 사회적 이슈가 되도록 크게 떠들어서는 논란만 증폭시킬 뿐 될 일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도서정가제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 경쟁촉진국의 이동국 국장을 찾아가서 왜 도서정가제를 지켜야만 하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도서를 할인 판매하게 되면 서점은 그만큼 출판사에 공급가를 낮춰 달라 요구할 것이고 출판사들은 서점의 요구를 들어 주려다 보면 할인을 전제로 정가를 높여 책정할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도한 할인율 경쟁으로 유통질서가 순식간에 파괴될 것은 자명한 일이며, 서점에서는 잘 팔리고 이윤이 많이 남는 책 위주로 판매를 하게 되고 악서가 양서를 내몰게 되어 독자는 물론 서점과 출판사,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국장은 무슨 상품이든 경쟁이 없으면 품질 향상이 안 된다면서 시장경제를 위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위해서라도 도서정가제는 폐지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국장은 논리가 정연하고 고집도 있었다. 그는 자유시장의 경제 원리에 예외를 두다 보면 한이 없다며 도서 역시 판매가격 자율화가 돼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그 날 이후에도 나는 계속 찾아가서 도서정가제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도서는 일반 공산품과 다르다는 것, 일본과 프랑스 등 선진국에 공정거래법이 없어서 도서정가제를 실시하겠느냐며 도서정가제 폐지에 따라 예견되는 문제점들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짚어 갔다. 이야기 도중 때로는 언성을 높이기도 해서 직원들이 놀란 얼굴로 국장실 문을 열고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그렇게 수없이 만나고 언쟁을 하다 보니 이 국장도 도서정가제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어느새 가까운 사이가 되어 농담까지 주고받게 되었다.
나는 문화체육부는 물론 국회 상임위 소속 의원 등 도서정가제 유지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 만나고 설득했다. 또 `출판인쇄진흥법`안을 만들 때는 소비자 단체와 독자들이 참가한 공청회를 통해 도서정가제의 필요성을 조목조목 설명하여 납득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개정된 `출판인쇄진흥법` 안에 도서정가제를 법조문으로 명기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출판인쇄진흥법 제22조 1항에는 `판매를 목적으로 발행하는 간행물에는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가격(정가)을 표시한다` 제2항에는 `저작물의 경우 정가대로 판매하여야 한다`는 조문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써 도서정가제가 법적으로 보장 받게 된 것이다.
<이규진기자 sky@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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