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산업이 ‘고반응성 폴리부텐’ 제조 세계 1위 자리 굳히기에 나섰다. ‘고반응성 폴리부텐’은 윤활유 및 연료첨가제 제조 시 필수적으로 쓰이는 원료. 지난 8월에는 ‘고반응성 폴리부텐’ 제조기술을 미국 업체에 팔아 국내 업계 최초로 석유화학 기술을 수출한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대림산업이 개발한 ‘고반응성 폴리부텐’ 제조기술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선정한 ‘광복 70주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에 포함될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폴리부텐은 주로 윤활유 첨가제와 연료 청정제 등의 원료로 사용되는 석유화학 소재다. 특히 기존 범용 폴리부텐의 기능성을 향상시킨 고반응성 폴리부텐은 윤활유 제조 공정을 단순화시킬 수 있고 제품내에 염소 성분도 없어 친환경성이 뛰어나다.
대림산업은 1993년 국내 최초로 범용 폴리부텐을 상업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폴리부텐 생산은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는 분야라 진입 장벽이 높은 시장이다. 실제 미국 다우케미칼과 독일 바스프가 전 세계 폴리부텐 수요량의 대부분을 공급해왔다. 꾸준히 기술을 축적해 온 대림산업은 2010년 독일·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고반응성 폴리부텐을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 동시에 세계 최초로 단일 공장에서 범용 폴리부텐과 고반응성 폴리부텐을 함께 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확보했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림산업은 올해 큰 ‘사건’을 일으켰다. 국내 업체 최초로 고반응성 폴리부텐 생산 기술을 미국 업체에 수출한 것이었다. 지난 8월 대림산업은 단일 공장에서 범용 폴리부텐과 고반응성 폴리부텐을 함께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윤활유 첨가제 세계 1위 회사인 미국 ‘루브리졸(Lubrizol)’에 수출했다. 대림산업 측은 “이번 기술 수출은 루브리졸이 대림산업의 기술력을 인정해 적극적으로 구매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됐다”고 밝히며 “대림산업과 루브리졸은 계약과 함께 포괄적 사업협력 양해각서도 체결해 양사가 향후 윤활유 관련 분야에서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루브리졸은 워런 버핏이 경영하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다. 루브리졸은 대림산업이 제공하는 기술로 휴스턴에 폴리부텐 공장을 건설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루브리졸은 대림산업의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세계 시장에서 윤활유 첨가제 선도기업 지위를 확고히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대림산업은 루브리졸로부터 폴리부텐 판매 매출액의 일정 부분을 기술료로 받게 된다. 대림산업은 “양사 합의에 따라 기술료율과 예상 매출액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반응성 폴리부텐 제조기술은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의 주도하에 10년간 연구개발을 거쳐 완성했다. 대림산업은 “고반응성 폴리부텐은 일부 기업만 제조할 수 있는 제품이어서 관련 제조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며 “각종 악조건 속에서도 오랜 기간 연구에 매달려 결국 순수 독자 기술로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반응성 폴리부텐은 경쟁사보다 저가 원료를 사용했음에도 품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림산업의 고반응성 폴리부텐 생산 기술력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높게 인정받고 있다. 2015년 ‘IR52 장영실상’을 수상했고, 광복 70주년을 맞아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선정한 ‘광복 70주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에도 포함된 바 있다.
현재 이해욱 부회장은 대림산업의 석유화학 부문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있다. 대림산업은 건설회사라는 통념과 달리 석유화학 부문의 영업이익 기여도가 높은 기업이다. 대림산업은 지난 1987년 호남에틸렌을 인수한 뒤 꾸준히 석유화학 부문 사업의 덩치를 키워왔다. 거기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건설 부문은 원가율이 안정되지 않아 수익 변동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반면 석유화학 부문에선 안정적이고 꾸준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대림산업은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시공 법인이 5,043억 원 적자를 내는 등 건설사업이 부진을 겪으면서 적자로 전환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지난해 석유화학 부문은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4.8%, 9.1% 증가했다. 영업이익률도 6.5%로, 2013년보다 0.3%포인트 높아졌다. 대림산업의 석유화학 부문 매출 비중은 2013년 15.4%에서 지난해 17.3%로, 영업이익 비중은 같은 기간 29.3%에서 57%로 증가했다.
폴리부텐은 대림산업 유화사업 이익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대림산업은 폴리부텐의 기초원료인 에틸렌을 자회사 여천NCC(YNCC)로부터 공급받아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자회사에서 원료를 받아 자체 기술로 만드는 만큼 타사 제품보다 경쟁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는 증권가 분석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올해 대림산업이 폴리부텐에서 높은 영업이익을 창출할 것으로 전망한 강승균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대림산업 석유화학사업부는 2014년 8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1,300억 원 이상이 예상된다”며 “주요인은 폴리부텐의 강한 글로벌 수요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무엇보다 고반응성 폴리부텐은 시장성이 좋다. 폴리부텐은 희소 품목이기 때문에 원료인 석유 가격 변동성과 무관하게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환경규제가 강화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친환경 윤활유 첨가제와 청정 연료제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고반응성 폴리부텐은 이들 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원료인 만큼 수요량이 연평균 4% 정도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대림산업은 전 세계 폴리부텐 시장에서 18%의 점유율을 보였다. 현재 대림산업의 폴리부텐 제품은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아 쉐브론(Chevron), 루브리졸(Lubrizol), 인피니움(Infineum) 등 글로벌 윤활유 첨가제 제조업체에 90% 이상 수출되고 있다.
현재 대림산업은 폴리부텐 생산 2위 업체인 독일 바스프와 생산 격차를 벌리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초 740억 원을 투자해 2016년 11월까지 여수국가산업단지에 있는 고반응성 폴리부텐 공장의 생산 능력을 연산 6만 5,000톤에서 10만 톤으로 증설하기로 결정했다. 대림산업은 폴리부텐 개발부터 공장 건설과 운영 및 증설까지 성공적으로 완료해 자체 기술력을 입증할 생각이다. 원료의 효율적인 사용을 통한 원가 절감과 생산성 증대도 기대하고 있다. 증설이 완료되면 대림산업의 폴리부텐 생산능력은 총 18만5,000톤(연산 8만5,000톤의 범용 폴리부텐 공장 포함)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를 통해 연산 14만톤 규모인 바스프와 격차를 벌려 세계 시장점유율 1위 폴리부텐 제조업체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계획이다.
대림산업의 이 같은 움직임을 놓고 관련업계와 증권가에선 단순한 시장지배력확보 차원을 넘어 대림 특유의 내실화 전략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박용희 이트레이드증권 연구원은 “이번 폴리부텐 생산량 확대 결정은 대림이 가진 강점을 최대화해 건설 부문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라며 “경영진도 석유화학 부문 이익 증대에 관심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대림산업은 오랜 기간 연구에 매진해 결국 순수 독자 기술로 고반응성 폴리부텐 개발을 성공시켰다. 1970년대 한국에 석유화학 기술이 도입된 지 40여 년 만에 석유화학의 본고장인 미국에 석유화학 제조공정의 핵심기술을 수출한 최초의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이 단순히 제품을 생산하는 수준에서 원천기술을 수출하는 위치로 지위가 한 단계 격상된 사건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림산업 김재율 대표이사는 “고반응성 폴리부텐 기술 수출은 대림산업의 기술력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은 증거” 라며 “미국 시장에 교두보를 마련해 세계 1위 폴리부텐 제조 회사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해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