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미래기획위원회가 최근 분석한 ‘선진화와 한국의 현위치’라는 내부 보고서에는 우리 기업과 관련해 엇갈린 평가자료가 실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500대 기업(매출 기준)에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46위), LG(73위), 현대차(76위), SK(98위) 등 14개 기업이 포진해 있다. 이는 우리보다 국가 브랜드 순위가 훨씬 높은 네덜란드(14개)나 스위스(13개)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를 두고 위원회는 “국가 브랜드 가치는 국가 경제력의 30%에도 못 미치는 데 반해 한국 기업은 세계 무대에서의 경쟁력을 증명하고 있다”며 국가보다 기업의 위상이 훨씬 높다고 평가했다. 반면 위원회는 세계 최고 윤리경영으로 존경 받는 기업 92개 가운데 한국 기업은 단 한 곳도 없고 근로자 1만명당 산재 사망률은 1.9명으로 영국(0.1명), 일본(0.5명), 미국(0.5명) 등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며 직장에서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국내 기업이 외형면에서는 경쟁력을 갖췄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랐다고 보기에 이르다는 얘기다. 한국경제를 먹여살리고 있지만 존경 받지 못하는 한국 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몸집 불리기에만 혈안이 돼온 국내 기업이 글로벌 시대를 맞아 이제 품격을 높일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이 진정으로 존경 받는 선진기업으로 발돋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변화하는 시대흐름에 대응해 사업가치+인간가치+사회가치 등 3박자를 갖춰야 한다고 주문한다. 박오수 한국경영학회 회장(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은 “최근 선진국 추세는 강하고 튼튼한 기업에서 뜻이 높은 기업으로, 즉 ‘좋은 기업(good company)’을 넘어 ‘위대한 기업(great company)’으로 기업상이 바뀌고 있다”며 “기업의 품격을 높이려면 사업가치만 추구해서는 안 되고 인간가치와 사회가치 세 가지를 균형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기업의 본질은 이윤추구이지만 종업원의 행복과 삶의 만족도 향상 등 인간가치는 물론 사회공헌ㆍ윤리경영 등 사회가치 실현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돈벌이에 치중하느라 종업원을 소모품 정도로 치부하고 공익발전을 애써 외면해왔던 기업들에 대한 따끔한 고언이다. 박 회장은 특히 “기업의 사회가치 추구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보다 사회 인프라 구축 등 사회가치를 재창출할 수 있는 사회투자가 바람직하다”며 “생선을 던져주는 자선사업 단계에서 벗어나 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 사회가 자생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 역시 기업의 품격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좋은 제품, 인재 중시, 사회 기여 등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기업은 무엇보다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고객만족이 우선이니까요. 종업원의 기업 만족도도 높여야 합니다. 경제대국으로 부르기가 무색할 만큼 급증 추세에 있는 산재율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근로자 안전과 복지가 개선돼야 종업원들이 회사에 긍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사회 기여를 생각해야 합니다. 돈 잘 버는 게 중요하듯이 잘 쓰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기업 이익을 사회에 적절히 환원할 때 기업의 품격도 자연스럽게 올라갈 것입니다.” 재계 역시 이 같은 주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동응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는 “우리 기업들도 이제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며 “기업의 품격이 한단계 올라가기 위해서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전무는 “예전에는 규모의 경제로 무조건 큰 기업이 좋았는데 지금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유연성과 사회에 떳떳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투명경영, 인력을 중시하는 인재경영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기업철학과 신뢰 역시 기업 품격 제고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꼽힌다. 노부호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기업이나 사람이나 품격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가치관 확립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고객을 위하는 게 사회발전에 기여한다는 기본철학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지요. 단순히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함께 모였다는 기업가 정신이 확고할 때 직원의 애정과 고객봉사 정신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결코 돈만 번다는 목적에서는 강력한 에너지가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 기업이 동남아나 중국 등지에서 야반도주해 손가락질을 받는 것도 모두 돈벌이에만 매몰돼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돼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노 교수의 지적이다. 고객이나 종업원의 신뢰 역시 마찬가지다. 조영주 KTF 사장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이 되려면 단순한 고객만족을 넘어 고객에게 진정으로 신뢰 받는 고객 감동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객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홍두 한라건설 사장도 “가장이 가족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화목한 가정이 되는 것처럼 회사의 최고경영자(CEO) 역시 직원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훌륭한 회사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직원들이 회사를 믿고 따라야 고객들도 회사를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글로벌 시대인 만큼 글로벌 기업 사고방식으로의 전환도 해외에서 기업 품격을 높이는 관건으로 거론된다. 박은연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50년간 글로벌 기업의 사고방식은 아웃풋과 창의성, 고객에 대한 가치 제공, 업의 본질이 중심인 데 반해 한국 기업은 인풋과 성실성, 경쟁사 제압, 기업 규모와 매출을 중요하게 여겨왔다”며 “앞으로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와 그 배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의 실정에 맞게 글로벌 방식을 적용해야만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 브랜드 가치 제고는 기업 품격의 결과물로도 비춰질 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기업만의 힘으로 글로벌 브랜드로 올라서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 따라서 글로벌 시대를 맞아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상호 이미지를 제고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 실제 국가 이미지와 상품 가격은 연관성이 높다. 예컨대 한국산 제품 지불 기대가격은 선진국인 독일ㆍ일본ㆍ미국 대비 65% 수준에 불과하다. 또 메르세데스(독일), 도요타(일본), 샤넬(프랑스) 등 선진국 기업의 글로벌 브랜드가 국가 이미지와 연계돼 있는 반면 삼성ㆍ현대ㆍLG 등 우리 글로벌 브랜드와 국가 이미지와의 연계성은 취약하다. 미국 대학생들은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일본 기업으로, LG를 미국 기업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상품 이미지 제고가 어려운 것은 정부와 기업 모두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가 이미지 제고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분단국ㆍ노사분규 등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고 정책지원은 중소기업에 국한해 브랜드 파워 여건이 갖춰진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은 제도적 한계에 막혀 있다. 기업 역시 자체 브랜드 개발 여력이 없어 노 브랜드 또는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 수출로 고부가가치화를 이루지 못하는 악순환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 전체 기업의 60%에는 브랜드가 없고 브랜드 육성에도 평균 5~7년이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보완 품목 간 공동 브랜드가 미미한 점 등 해외 마케팅 실패가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반해 해외에서는 기업 상품 이미지 제고를 위한 정부와 기업 간 공동 브랜드 육성의 성공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부 주도로 공동 브랜드 육성을 지원하는 뉴질랜드가 대표적이다. 뉴질랜드는 지난 1993년 국가 이미지를 제고해 기업의 해외 마케팅을 지원하기 위한 '뉴질랜드 웨이'라는 조직을 출범시킨 뒤 'Zespri(키위)' 'Enza(사과ㆍ배)' 등 공동 브랜드를 만들어 현재 5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미국도 '선키스트(오렌지)' '블루다이아몬드(아몬드)' 등 협동조합과 주 정부 지원 아래 공동 브랜드를 육성, 운영하고 있다. 캐나다 역시 정보통신ㆍ천연자원 등 12개 산업을 대상으로 한 '브랜드 캐나다'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 수출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 또 이탈리아는 패션ㆍ공예ㆍ기계 등 산업별 통합 브랜드를 운영하며 스웨덴은 가구제품 외에 중소업체 제품을 글로벌 가구 업체인 이케아 매장에서 판매함으로써 중소기업의 이미지 제고를 간접 지원하고 있다. KOTRA의 한 관계자는 "국가 브랜드 제고에 영향력이 있는 패션ㆍ디자인 산업과 중견기업 브랜드 수출을 집중 지원하는 한편 한국 상품의 명품 이미지 지원을 위한 관리체계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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