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현대차 임직원 100여 명이 출동했다. 현대차의 새로운 브랜드 런칭을 알리는 자리였다. 이 자리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도 참석했다. 정 부회장은 제네시스를 도요타 렉서스처럼 별도의 고급 브랜드로 만들어 전 세계 고급차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정 부회장은 “대중 브랜드보다 고급 브랜드의 성장률이 더 높다”며 “프리미엄 시장에 진출하려면 고급 브랜드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브랜드를 등급으로 분류할 땐 보통 ‘슈퍼 프리미엄’, ‘프리미엄’, ‘서브 프리미엄’, ‘이코노미’ 4가지로 나눈다. ‘슈퍼 프리미엄’엔 벤틀리, 애스턴 마틴, 마세라티 같은 브랜드가 포함된다. 메르세데스 벤츠, BMW, 아우디, 재규어, 랜드로버, 렉서스, 캐딜락 같은 브랜드들은 ‘ 프리미엄’ 에 해당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급차가 여기에 속하는 셈이다. 폭스바겐, 포드, 도요타, 르노, 현대차 등 대중 브랜드 차량이 ‘ 서브 프리미엄’ 에 포함되고, 가격에 매우 민감한 소비자를 겨냥해 생산하는 저가차 브랜드 타타, 둥펑, 라다 등이 ‘ 이코노미’에 해당된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조사업체인 IHS는 전세계 고급차 시장이 지난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연평균 판매 증가율 10.5%를 기록하며 대중차 시장 증가율(6%)을 크게 웃돌았다고 분석한 바 있다. 전 세계 고급차 시장 수요 역시 올해부터 연평균 4%씩 늘어 2019년엔 1,000만 대를 돌파할 것이라 전망했다. 고급차 시장은 성장성뿐만 아니라 수익성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주요 완성차 업체 11곳의 지난해 실적을 분석한 결과 영업이익률은 평균 3.9%였다. 반면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8.8%를 기록했다. 고급차 브랜드를 별도로 확보하고 있는 자동차메이커들도 마찬가지였다. 2014년 실적 기준으로 고급차 브랜드 렉서스를 보유한 도요타의 영업이익률은 8.6%, 아우디 브랜드를 갖고 있는 폭스바겐은 6%였다. 도요타그룹의 경우 지난해 렉서스는 전년 대비 판매량이 9% 증가한 반면, 도요타는 2.4% 증가하는 데 그쳤다. 폭스바겐그룹 역시 자사 고급차 브랜드(아우디, 포르쉐, 벤틀리, 람보르기니 등)의 판매 증가율(11.1%)이 대중 브랜드(폭스바겐, 스코다, 세아트 등) 판매 증가율 (3.4%)을 3배 이상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전 세계적인 경기불황이 길어지면서 경제양극화가 심화돼 고급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자동차 고객들은 남들과 비슷한 구매 형태에서 벗어나 보다 자신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제품과 경험에 대한 소비를 늘리고 있다. 특히 품질과 안전성, 주행성능, 럭셔리 차량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지는 등 점차 고급화가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이 이 같은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대중차 성장속도를 앞지르는 고성장세와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고급차 시장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뜨거운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성장 빠른 고급차시장 뺏길 수 없다”
현대차의 고급차 브랜드 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중 브랜드로 고급차 시장을 두드리는 건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신흥국들의 저가 차 공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현대차에겐 고급차 시장 진출이 반드시 필요했다.
현대차의 고급 브랜드 도입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현대차는 1세대 제네시스 차량 개발에 착수한 2004년부터 독립 브랜드 출범을 추진해왔다. 2006년 국내와 북미에서 고급차 관련 태스크포스팀을 운영했으며, 외부 전문 컨설팅 업체를 통한 시장 조사와 수익성 분석도 진행한 바 있다.
2008년 출시한 1세대 제네시스는 후륜구동 고급 세단으로 ‘ 2009년 북미 올해의 차’ 에 오르며 현대차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현대차는 별도 브랜드를 단 고급차 시장 진출을 일단 접어두었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로 고급차 시장이 위축됐고, 성능이나 품질 면에서 더욱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현대차는 고급차 시장에서 벤츠, BMW 등 전통적인 유럽 고급차 브랜드와 경쟁을 하기 위해선 자동차의 기본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현대차는 그 후 기술 및 품질 향상에 매진했다. 1세대 제네시스에 이어 2013년 출시한 2세대 제네시스는 탄탄한 뼈대를 바탕으로 5대 기본성능( 동력성능, 안전성, 승차감 및 핸들링, 정숙성, 내구성)과 디자인을 글로벌 명차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해외에서 현대차를 다시 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현대차가 제네시스를 고급 브랜드명으로 낙점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대중차를 뛰어넘어 고급차 시장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걸 과제로 정하고 새로운 브랜드 개발을 진행해왔다”며 “2008년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프리미엄세단 1세대 제네시스를 선보인 이후 자신감을 가졌고, 결국 제네시스 브랜드에 이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물론 고급차 브랜드 도입에 따른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출범한 지 25년 된 렉서스의 전 세계 판매량이 60만 대 안팎(고급차 시장 점유율 약 7%)이고, 닛산과 혼다의 고급 브랜드(인피니티, 아큐라)는 여전히 존재감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차에게 제네시스 브랜드 런칭은 쉽지만은 않은 도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고급 브랜드 전환에 따른 차량가격 인상을 소비자들에게 이해시키려면 ‘렉서스는 정숙하다’와 같은 제네시스만의 차별적인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며 “프리미엄 이미지와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네시스’ 브랜드 첫 모델 EQ900
현대차그룹은 앞으로 제네시스 브랜드의 성공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제네시스 브랜드 프로젝트의 첫 출발은 초대형 세단EQ900(해외명 G90)이다. 에쿠스 3세대 모델이지만 ‘에쿠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차량이다. ‘에쿠스’란 이름이 탄생 16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올해 12월 9일 국내에서 먼저 출시하는 EQ900은 5년간 연구원 1,200명이 참여해 만든 현대차의 야심작이다.
제네시스 브랜드의 상품 차별화 방향은 ‘편안하고 역동적인 주행성능’과 ‘사람을 향한 혁신기술’이다. EQ900 역시 마찬가지다. 차체 50% 이상에 초고장력강판을 적용하고, 엔진룸엔 다이아몬드형으로 스트럿바(차체의 틀어짐을 최소화해 주행 안정성을 높여주는 보조장치)를 연결한 차체 구조를 적용해 코너링 주행 시 안정감을 대폭 향상시켰다.
차별화된 승차감을 구현하기 위해 수백 여 개종류의 과속방지턱과 험로를 달리며 수없이 평가하고 차량을 개선했다. 자동차 주행 테스트 도로로 유명한 독일 뉘르부르크링과 미국 모하비 사막 주행시험장에서도 극한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뒷자리에 적용된 ‘퍼스트 클래스 VIP 시트’는 항공기 1등석처럼 원터치로 휴식, 독서, 영상 모드로 전환되도록 편의성을 높였다. 현대차는 EQ900의 안락함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보잉 737800의 1등석 시트를 직접 뜯어보기까지 했다. 3~4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최고급가죽을 골랐고, 그 결과 이탈리아 최고급 가죽 가공 브랜드인 ‘ 파수비오’ 와 협업해 내장 가죽을 개발해냈다.
제네시스 브랜드는 디자인 차별성을 강화하고자 별도의 디자인 조직을 구축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루크 동커볼케가 내년 상반기 현대차에 합류해 제네시스 브랜드 강화에 나설 예정이다. 현대차는 2020년까지 세단과 SUV, 쿠페 등 총 6종의 모델을 내놓을 계획이며, 파워트레인 다변화 등 파생모델 투입도 고려하고 있다.
현대차는 제네시스 브랜드의 정체성을 이른 시일 내 확보하기 위해 독자적인 판매 및 서비스망 구축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당분간은 현대차의 판매 채널과 서비스 거점을 공유할 예정이다. 그러나 별도 판매공간 등 완전히 차별화된 서비스를 요구하는 고급차 고객들을 잡기 위해 채널 분리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현대차는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으로 대중차 브랜드인 현대차의 경쟁력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급차에 우선 적용된 기술을 대중차 브랜드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기술이 적용된 대중차의 판매가 증가하면 이는 다시 고급차를 위한 선행 기술 개발여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현대차의 한 관계자는 “고급차 브랜드는 대중차 브랜드가 확보하기 어려운 고급 이미지를 강화시킨다”며“아우디, 벤틀리, 람보르기니 같은 고급차와 슈퍼카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폭스바겐그룹의 경우에도 대중차 브랜드인 폭스바겐에서 이 같은 후광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가 내놓은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의 성공 관건은 소비자 반응이다. 제네시스를 벤츠, BMW, 렉서스 등과 동급으로 생각할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현대차는 제네시스 브랜드가 벤츠, BMW 같은 브랜드와 경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반세기 동안 축적한 현대차의 기술 역량과 장인정신이 제네시스 브랜드에 결집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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