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천 모 씨는 서울 잠실 신천역 인근의 한 상가건물에서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포함해 총 8억원의 비용을 들여 모텔 사업을 시작했다. 공사 전 새 건물주에 공사 계획을 알렸고 지은 지 약 30년 된 낡은 건물이라 오랜 공사 끝에 11월에야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텔을 운영한 지 열흘쯤 지난 후 임대차계약 해지 통보서가 날아왔다. 오피스텔 재건축 계획이 잡혔으니 신규 세입자를 구하지 말고 올해 9월까지 점포를 비워달라는 내용이었다. 공사 비용은커녕 권리금도 회수하지 못하고 나가야 할 처지에 놓인 천 씨는 "건물주의 갑질에 재산을 다 날리게 생겼다"며 망연자실했다.
11일 서울경제신문의 취재 결과 일방적인 계약 해지 통보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건물주는 김종섭 삼익악기(002450) 회장으로 확인됐다. 법원에서 발급한 부동산 등기부등본 기록에 따르면 김 회장은 지난해 7월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남전빌딩을 190억원에 매입했다. 당시 임차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새 주인인 김 회장의 대리인 A씨와 계약을 갱신했다. A씨는 임차인들에게 건물관리를 위해 김 회장이 설립한 개인회사인 금강실업의 상무라며 자신을 소개했고 임차인들은 계약 갱신부터 리모델링, 신규 세입자 물색 등 모든 사안을 A씨와 상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취재 결과 A씨는 삼익악기의 시설관리 담당 임원으로 김 회장은 개인 재산인 남전빌딩 관련 업무에 A씨 이외에도 삼익악기 직원들을 활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건물과 관련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다. 임차인들 가운데 몇몇이 신규 세입자와 구두로 점포 매매거래를 성사한 후 A씨에게 계약서 작성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조만간 건물을 헐고 오피스텔을 지을 예정이어서 신규 세입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후 각 입주 점포로 김 회장 명의로 된 '재건축 계획에 따른 임대차계약 종료 통보 내용증명'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해지통보의 근거는 계약서 상에 '재건축 시 임대차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해지 통고 후 6개월 뒤부터 해지의 효력이 발생'한다는 부분이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서 임차인의 계약갱신은 5년간 보장하고 있지만 재건축할 경우는 예외다. 게다가 건물주에게 주는 보증금과 달리 점포 시설비와 영업권 등에 대한 자릿값 명목으로 신규 세입자가 직전 세입자에게 주는 권리금은 보호 대상이 아니다. 결국 임차인 모두 임대 기간에 상관없이 권리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점포를 내주게 됐다. 권리금은 각 점포별로 서로 다르지만 대략 1억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의 핵심은 재계약 당시 임차인들이 '1년 이내 재건축이 예정돼 있다는 사실'을 통보했느냐 하는 대목이다. 세입자들은 "지난해 8월 A씨가 임차인들에게 공문을 돌리고 재계약 서류를 작성하게 하면서 1년 이내로 재건축 계획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A씨는 취재진과의 전화통화에서 "임차인들에게 1년 이내 재건축이 추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며 "시한 내에 계약 해지 절차를 밟지 않은 임차인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진행하더라도 총 계약기간 5년을 넘긴 업체들이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삼익악기는 이번 사안과 관련해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삼익악기 관계자는 "빌딩 매입은 회장 개인의 재산 문제이고 회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법의 테두리 내에서 문제없이 해결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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