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스타인 Jay Stein은 가족 상점을 스타인 마트 할인점 체인으로 탈바꿈시켰다.
By Beth Kowitt
제이 스타인의 가족은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의 할아버지는 미국으로 이민와 미시시피 Mississippi 주의 그린빌 Greenville에 잡화점을 열었다. 약 70년이 흐른 후 스타인은 가족의 잡화점을 저렴한 가격에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판매하는 백화점 체인으로 변신시키기 시작했다. 스타인 마트 Stein Mart는 29개 주에 걸쳐 266개의 지점을 거느린 13억 달러의 매출을 자랑하는 상장 기업으로 성장했다. 올해 68세의 스타인은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은 후에도 은퇴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고 여전히 야심 차 보인다.
나의 조부 샘 스타인 Sam Stein은 1905년 단돈 43달러를 들고 뉴욕시로 이민했다. 그는 당시 러시아가 점령했던 폴란드에서 탄압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나는 정확히 100년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엘리스 아일랜드 Ellis Island를 방문했다. 그 후 항해일지 속 할아버지의 서명 옆에 적힌 주소에 찾아갔는데 맨해튼 Manhattan 도심에 있는 루이비통 매장 바로 옆이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그 건물을 매입해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월가에서 서류 배달 같은 심부름을 했지만 뉴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뉴욕은 너무 크고 북적거렸다. 그래서 5센트씩 받은 팁을 모두 모았고, 떠날 수 있을 만큼 모이자 멤피스 Memphis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이민자들에게 바늘, 실, 양말 같은 잡화를 봉투에 담아서 파는 상점을 열었다. 이민자들은 다른 곳에 가서 물건을 판매하고 돈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매주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기선에 싣고, 미시시피 삼각주에 가서 농부들과 일꾼들에게 팔았다.
그는 미시시피 주의 그린빌에서 하선했고 마을이 새로 회당을 짓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혼잣말로 ‘이곳은 유대인들에게 친절한 곳임에 틀림없어. 좋은 마을 같군’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을에 정착했고 계속 농장들을 방문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의 누군가가 “잡화점을 만드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고, 여기에 들어갈 돈을 빌려줬다.
그는 결혼해서 네 자녀를 뒀고 상점은 일가에게 삶의 일부였다. 이 멋지고 친절한 남부 마을에서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1933년 대공황 당시 할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가장 맏이였던 나의 부친 제이크 Jake는 축구 특기생으로 앨라배마 대학교 (University of Alabama)를 다녔다. 하지만 그는 가게에서 일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왔다.
마을은 커졌고 거리에 더 좋은 자리가 생겼다. 아버지는 동생들에게 새로운 가게를 열자고 제안했고, 자신이 원래 상점의 제품을 다 팔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폐업 판매가 성황을 이루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새로운 상점을 계속 운영하라”며 “기존 가게를 판촉 매장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사업 모델을 우연히 생각해냈다. 바로 훌륭한 제품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대폭 할인된 가격에 파는 할인점 개념이었다.
나는 1945년 태어났고 학교, 집, 일이 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상점에 있었다. 항상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내가 그 일을 했다. 당시엔 직책이 많지 않았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점포를 확장했다. 삼촌이 새 건물에 이름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없다고 대답하자 삼촌은 “샘 월튼 Sam Walton이라는 내 친구가 아칸소 Arkansas에 상점을 여는데 이름을 월-마트 Wal-Mart라고 지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스타인 마트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전에는 스타인스 Stein‘s였다.
나는 현재 살고 있는 잭슨빌 Jacksonville의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뉴욕대학교 (New York University)에 진학했다. 1967년 그린빌로 돌아온 첫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 차를 주차시키고 길을 건넌 후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했다. 30초 동안 생각하고 상점 문을 열었다. 그곳에 내 삶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준비는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업을 작게 유지하고 싶어했고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30년간 해온 방식대로 사업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다. 그의 근면함이 내겐 고통스러웠다. 그는 일 중독자였고 절대 상점을 떠나지 않았다. 금요일 밤 데이트를 나갈 때도 저녁 9시에 만나야 했다. 아버지가 여전히 일하고 있었고, 그를 두고 나간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정한 방법대로 하는 사람이었고, 약간의 일탈도 내켜 하지 않았다. 반면 마을에선 모든 면에서 인기가 높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교회의 회합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상점에 대해서는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
우리는 삭스 피프스 애비뉴 Saks Fifth Avenue *역주: 뉴욕 쇼핑의 중심지인 5번가 안에 자리한 백화점에서 일부 제품을 가져다 싸게 팔았다. 삭스는 계속 우리가 더 많은 상품을 취급하길 원했다. 수년간 나는 더 큰 도시에 상점을 내자고 이야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보러 가자”고 말했다. 1977년 우리는 멤피스에 가서 3만 평방피트(약 840평) 크기의 부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부지를 보고 “이 중 반을 사자”고 얘기했다. 나는 “반으로 뭘 해요? 사려면 전부 다 사야 해요!”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우리는 다시 다퉜다. 결국 소유주가 적절한 가격을 제시해 땅을 전부 매입할 수 있었다.
개장일은 아주 장관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두 여성의류 코너로 직행했다. 나는 “세상에, 3일 만에 여성용 제품이 바닥 나겠네”라고 말했다. 나는 제품을 더 구입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갔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할인계약 전문 바이어인 필 도뷸러 Phil Dobular를 소개받았다. 그는 뉴욕 시장의 모든 상인들을 알았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인물이다. 브루클린과 그린빌의 조합은 무적이었다. 우리는 25년간 동업했다.
그린빌에서 우리는 삭스의 판촉행사 동안에 일하길 원하는 친구들의 부인을 고용했다. 그들은 먼저 제품을 보고 할인을 받았다. 멤피스에서 상점을 여는 날, 제인 캐러더스 Jane Carruthers라는 여성이 내게 왔다. 그녀는 멤피스 지역사회와 문화의 중심인 주니어 리그 Junior League *역주: 상류 여성들로 조직된 사회봉사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여기서 일할 수 있나요? 친구들 몇 명도 여기서 일하고 싶어 해요”라고 말했다. 그 네 명은 내가 만나본 중 가장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성들이었다. 이렇게 부티크 프로그램 Boutique Program이 탄생했다. 우리는 지역 여성들을 고용했고, 그들은 상점에 대해 소문을 퍼트렸다. 그래서 우리의 신뢰도는 매우 높아졌고 여성들은 즐거워했다. 매장을 새로 열 때마다 부티크 프로그램의 효과를 봤다. 스타인 마트가 초기에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시스템과 프로세스에 더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멤피스에서 첫 번째로 고용한 사람은 훌륭한 경영자인 칼 데이비스 Carl Davis였다. 우리는 그에게 엄청난 도움을 받고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린빌에서 반기지 않았던 재고관리 일을 맡았다. 당시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이 더 필요했다. 4번째 상점을 열기 전, 운영을 맡기기 위해 잭 윌리엄스 Jack Williams를 고용했다. 아버지는 “그가 무슨 일을 할거냐?”고 물으셨다. 그는 현장에서 판매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잭의 말을 경청했고 그를 존중했다. 때로 아버지에게 새로운 상점을 열 계획이라고 전하는 것이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일 때도 있었다. 잭은 친구이자 고문이자 동업자였다. 그는 3년 전 비상근직으로 전환했지만 아직도 거의 매일 사무실에 출근한다. 우리는 10번째 상점을 열었고 계속 일했다. 1992년 46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을 당시 기업을 공개했다. 가족을 위해 개인 유동성을 확보하고, 확장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상장했다.
15년 전 혈관 우회수술을 받고, 이 일을 매일 하면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 잘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 명의 CEO를 고용했지만 다 실패했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장사꾼이 아니었다. 소매점을 운영하려면 장사꾼을 써야 한다. 세 번째 CEO도 실패로 끝난 후 나는 임시 CEO직을 맡았다. 16개월 후 한 기자가 내게 “언제 임시 직책을 뗄 건가?”라고 물었고, 나는 “바로 지금”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미처 그 파장을 깨닫지 못했지만, 법률 고문이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람들은 내가 돌아온 걸 정말로 기뻐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우리 회사는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하다.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다. 더 안정적이고 자신감이 있다. 현재 우리는 266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 10개, 내년에는 15개를 새로 열 예정이다. 회사 규모를 두 배로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 기준과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사업 파트너를 찾으면 회사를 합병할 계획이다. 그러나 서두르진 않을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구체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유산이자 이름이다.
나의 조언
제이 스타인
스타인 마트 회장 겸 CEO
직원들은 당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초기에 한 번이라도 직원을 잘못 고용했다면 우리는 끝났을 것이다. 당신보다 훨씬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고용하라. 그들을 잘 대우하고 사랑하고 포용하라.
위치, 위치, 위치가 중요하다. 장사를 하면서 물건을 잘못 사면 다 팔아 치우는 데 6주 정도 걸린다. 하지만 부동산을 잘못 매입하면 빠져 나오는 데 족히 10년이 걸린다. 입지를 잘못 정하면 많은 돈이 들 수 있다.
천천히 성장하라. 우리는 매장이 10개가 됐을 때 “이제 10개 더 열 수 있다”고 했다. 하루 아침에 매장을 100개까지 늘리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서두르다가 자산을 너무 빨리 써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