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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컴퓨터는 곧 국가 경쟁력, 한국 기술발전 어디까지 왔나

슈퍼컴퓨터의 역사는 40여 년에 불과하다. 그동안 슈퍼컴퓨터는 ‘머리 좋은 컴퓨터’에서 ‘생각하는 컴퓨터’로 진화했다. 이제 슈퍼컴퓨터는 ‘일하는 컴퓨터’를 표방하며 산업계 전반에서 활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슈퍼컴퓨터가 곧 국가의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각국 정부는 슈퍼컴퓨터 기술 개발과 활용방안 마련에 고삐를 죄고 있다.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지난 2011년 2월 14일, 전 세계를 흥분시킨 세기의 퀴즈대결이 펼쳐졌다. 미국 유명 퀴즈쇼 ‘제퍼디Jeopardy의 최다 우승자와 최다 상금획득자, 그리고 조금은 특별한 스페셜 게스트가 격돌했다. 스페셜 게스트는 바로 IBM의 슈퍼컴퓨터 ‘왓슨Watson’.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컴퓨터와 퀴즈왕의 대결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틀간 열린 인간 대 컴퓨터의 퀴즈쇼는 손에 땀을 쥐는 명승부를 연출했다. 과연 누가 우승할까? 대다수 전문가들은 인간의 우세를 점쳤다. 퀴즈에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성이 담겨 있다. 이를 컴퓨터가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특히 1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 과연 컴퓨터가 인간의 직관을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왓슨은 인간 퀴즈왕보다 무려 3배 많은 7만7,147달러의 상금을 획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전 세계 언론과 IT전문가들은 ‘기계가 사람을 이겼다’며 왓슨, 그리고 슈퍼컴퓨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컴퓨터’, 슈퍼컴퓨터의 진화

슈퍼컴퓨터의 성능은 일반컴퓨터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슈퍼컴퓨터의 데이터 연산처리 속도는 매초 100만조 번을 넘는다. 이는 최고 사양 일반 컴퓨터보다 200배 이상 빠르다. 그런 까닭에 슈퍼컴퓨터는 기상예보, 신약 개발, 암호해독, 대형 건물 및 원자력 발전소 설계, 경제모델 분석 분야에 주로 사용된다. 세계 최초의 슈퍼컴퓨터는 1976년 제작된 미국의 ‘크레이-1’이다. 크레이-1은 70년대 당시 1초에 2억 4,000회의 연산속도를 보유하며 슈퍼컴퓨터 역사를 열었다.

일반 대중에게 슈퍼컴퓨터의 존재를 처음 각인시킨 제품은 IBM의 슈퍼컴퓨터 ‘왓슨Watson’이다. IBM 창업자인 토마스 J. 왓슨Thomas J. Watson의 이름을 딴 왓슨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자연언어로 된 질문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답 가능한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과학자들의 도전에서 시작됐다.

왓슨은 약 15조 바이트의 메모리를 내장하고 있다. 메모리에는 수학, 과학, 인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데이터가 저장돼 있다. 지난 2011년 왓슨이 퀴즈쇼에서 문제를 풀 당시, 왓슨은 인터넷 정보가 아닌 자체 내장 정보로만 해답을 찾아냈다. 특히 인간의 소통 방식을 터득해 은유적 표현까지 이해하는 수준을 자랑했다.

IBM과 같은 대형 글로벌 IT기업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은 정부 주도하에 슈퍼컴퓨터 개발을 진행 중이다. 특히 주요 국가들은 슈퍼컴퓨터가 단순 연구개발이 아닌 산업분야에 활용될 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슈퍼컴퓨터 경쟁 “한국은 글쎄...”

현재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가장 앞선 국가는 미국이다. 비록 지난해 6월 전 세계 슈퍼컴퓨터 순위를 선정한 ‘톱500’에서 중국의 ‘톈허-2’에 1위 자리를 내줬지만 여전히 순위권에 포진한 절반이상의 슈퍼컴퓨터는 미국의 것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미국은 ‘타도 일본’을 외칠 정도로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한발 뒤져 있었다. 당시 미국 에너지부수장 스펜서 아브라함 장관은 조만간 슈퍼컴퓨터 시장의 주도권을 잡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에너지부는 태풍, 홍수, 가뭄 등 기상이변을 예측하고 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지구 시뮬레이터’에 슈퍼컴퓨터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아브라함 장관은 말했다.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미국이 일본에 지고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조만간 우리는 주도권을 되찾을 것이다.”

에너지부는 ‘향후 20년간 미국이 집중해야 할 20개 개발과제’에 슈퍼컴퓨터 개발을 포함시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도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경우 정부 주도로 슈퍼컴퓨터센터를 설립, 아시아 최초로 독자적인 제조기술을 확보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톱500 중 4위에 오른 일본 슈퍼컴퓨터 ‘K’를 민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예를들어 일본 주력 수출품목 중 하나인 자동차 업체들은 차체 충돌 실험을 슈퍼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대체, 실험 비용 감소 효과를 얻고 있다.

중국의 경우 슈퍼컴퓨터 신흥 강국으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중국 국방과학기술대학 주도로 제작된 ‘톈허-2’는 미국에너지국 내부에 설치된 슈퍼컴퓨터 ‘타이탄’보다 연산속도가 2배 빠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같은 기술의 진보를 불과 1~2년 만에 달성했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은 황사, 스모그 등 환경 분야를 포함한 다양한 연구 활동에 톈허-2를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해외 주요 국가는 정부 주도하에 앞 다퉈 슈퍼컴퓨터 지원·개발에 나서고 있다. 반면 국내 슈퍼컴퓨터 기술력은 아직 글로벌 수준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덴버에서 개최된 ‘국제 슈퍼컴퓨팅 컨퍼런스’는 국내 슈퍼컴 산업의 현주소를 잘 보여줬다.

지난 2012년 국제 슈퍼컴퓨터 톱500에 포함된 국내 슈퍼컴퓨터는 총 4대다. 당시 기상청의 해담과 해온,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타키온2, 서울대 천둥은 각각 77위, 78위, 89위, 278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해담, 해온, 타키온2는 순위가 하락했다. 순수 토종 슈퍼컴퓨터인 천둥은 아예 순위에서 빠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정부의 투자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자원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도 지난 2011년 ‘슈퍼컴퓨터 육성법’을 발효하며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국가 초고성능 컴퓨팅 육성 기본계획’은 1년이나 늦은 지난 2012년 말에 수립됐다. 자연스레 관련 예산 확보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순위하락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이는 순수 토종기술로 만들어진 슈퍼컴퓨터 ‘천둥’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이재진 서울대 교수의 주도하에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연구팀이 자체 개발한 ‘천둥’은 2012년 개발되자마자 톱500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그린 500(GREEN 500)에서 21위를 기록하며 ‘친환경 저전력’ 슈퍼컴퓨터로 선정됐다.

슈퍼컴퓨터의 사용에 있어 성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전력’이다. 대규모 연구소나 공장의 경우, 대규모 슈퍼컴퓨터 사용을 위해 별도의 발전소를 세우기도 한다. 가동에 소비되는 엄청난 전력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상용화 여부의 최대 관건이다. 그런 까닭에 천둥의 그린500 선정은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제대로 된 지원과 개발이 이뤄진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걸 수 있다는 기대도 높다.


슈퍼컴퓨터로 ‘산업 경쟁력’ 키운다

지난해 개봉한 3D영화 ‘미스터고’의 주인공은 ‘링링’이라는 이름의 고릴라다. 이 영화는 흥행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국내 상업영화 역사상 가장 진일보한 컴퓨터 그래픽(CG)이 사용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순수 국내 3D그래픽 CG 기술로 완성된 링링의 탄생에는 슈퍼컴퓨터가 한몫했다.

미스터고의 제작을 담당한 덱스터디지털 스튜디오는 LG엔시스의 클라우드 기반 ‘스마트렌더’ 서비스를 적극 활용했다. CG작업에는 2차원의 그림을 바탕으로 빛, 배경, 원근감 등 모든 정보를 계산해 3D 개체를 만들어내는 렌더링 작업이 필수다. 대규모 계산능력이 필요한 만큼 슈퍼컴퓨터의 활용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처럼 국내 주요 산업군에서는 슈퍼컴퓨터를 적극 활용해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개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도 늦게나마 슈퍼컴퓨터 개발 지원을 위해 지난해 1월 ‘국가슈퍼컴퓨팅연구소’를 출범시켰다. 특히 정부는 이번에 출범한 연구소를 통해 슈퍼컴퓨터를 각종 산업에 연계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KISTI는 최근 ‘국가 슈퍼 컴퓨팅 연구소’ 주도로 개발한 슈퍼컴퓨터 심플루(SimFlu)를 활용해 독감 바이러스의 변이 예측에 나서고 있다. 심플루는 예측하기 어려운 독감바이러스의 변이를 미리 예상하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다.

일반인들은 매년 독감 백신을 접종한다. 하지만 변종이 발생할 경우 백신만으로 예방할 수 없다. KISTI는 심플루를 통해 컴퓨팅 환경에서 미리 발생 가능한 변종 바이러스 후보군을 생성하고 이에 맞는 백신 개발을 도울 방침이다.

미래창조과학부(이하 미래부)는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을 지원한다. 미래부는 지난해 20개 내외의 중소기업 선정을 마무리 짓고 올해부터 슈퍼컴퓨터 무료사용, 무료 소프트웨어, 기술개발 전문 인력 등을 제공할 방침이다.

미래부는 오는 2015년까지 슈퍼컴퓨터 지원 대상을 40여개 수준으로 확대한다. 궁극적으로는 슈퍼컴퓨터 독자개발 역량을 끌어올려 세계 20위 슈퍼컴퓨터 강국으로 발돋움 하겠다는 각오다.

박영서 과학기술정보연구원장은 말한다. “슈퍼컴퓨터를 활용하면 제품 개발 시간과 비용을 40% 이상 줄일 수 있다. 이처럼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 경쟁력 강화에 슈퍼컴퓨터 활용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미 해외 시장에서는 슈퍼컴퓨터를 일반 산업 군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미국의 경우 오하이오 주에 위치한 2,800여 철강·플라스틱 관련 업체들을 대상으로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장세가 주춤했던 지역 산업이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다. 또 미국 국가경쟁력위원회는 자체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제너럴 일렉트릭, 보잉 등의 부품 공급 중
소기업에게 슈퍼컴퓨터 활용을 지원 중이다. 이를 통해 미국 내 대기업은 고성능 부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중소기업 역시 제품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는 슈퍼컴퓨터를 통한 상생협력 모델로 손 꼽힌다. 일반인들에게도 슈퍼컴퓨터는 점차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최근 정부와 기업이 잇달아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콘텐츠 개발 소스API를 일반에 공개, 그 활용도가 점차 높아질 전망이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가상화폐 ‘비트코인’은 금처럼 쉽게 현금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급등하고 있다. 비트코인을 얻기 위해서는 고사양의 컴퓨터가 필요하다.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로는 비트코인 채굴이 사실상 어렵다.

그런 까닭에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비트코인 채굴이 각광받고 있다. 심지어 해외에는 비트코인 채굴을 위해 슈퍼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연구실을 설립한 회사도 있다. 1인 개발자들도 클라우드 방식의 슈퍼컴퓨터 연산능력 활용으로 고성능 애플리케이션 개발이 가능하다. 이처럼 슈퍼컴퓨터는 비용의 문제로 제약을 받았던 영세 중소기업에게 연구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슈퍼컴퓨터는 앞으로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무기로 각광받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선결과제도 있다. 슈퍼컴퓨터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인재 육성이 필요하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으로 불리는 이상묵 서울대 교수는 지난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피터 힉스 교수의 연구에 참여한 물리학자다. 힉스교수에게 노벨상을 안긴 ‘힉스입자’의 발견에는 슈퍼컴퓨터가 적극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수는 말한다. “창조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산업계에서도 슈퍼컴퓨터를 통한 계산과학 분야를 적극 활용하려는 생태계가 조성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태계 확산을 위해서는 슈퍼컴퓨터 조성 등의 하드웨어는 물론 운영인력육성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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