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네라이는 이탈리아 군사용 기능성 시계 제조업체에서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로 성장한 기업이다. 수십 년간이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 브랜드는 세상에 이름을 공개한 지 16년 만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가 되었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007 시리즈 영화가 나올 때마다 본드걸 못지않게 주목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007이 사용하는 첨단 무기들이다. 비밀 공작소에서 만들어진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무기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 중에도 과거 비밀 공작소였던 곳이 있다. 바로 파네라이다. 파네라이는 대부분의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들이 쓰는 오롤로지(Horology·고급 시계) 수식어를 쓰지 않는다. 대신 오피시네(Officine)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오피시네는 공작소라는 의미로 이 단어에는 과거 이탈리아 국가 공작소로 활약했던 파네라이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파네라이는 이탈리아 궁정 해군 또는 해군 특수부대의 장비 제작소였다. 1993년까지 이탈리아 해군 기밀문서로 묶여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탓에 비교적 최근까지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였다. 파네라이가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로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건 1997년 리치몬트 그룹에 인수되면서부터다.
파네라이의 시작은 18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립자인 지오바니 파네라이 Giovanni Panerai가 1860년 이탈리아 플로랑스 지방에 시계제작소를 설립한 게 그 시초다. 이 시계제작소는 시계를 만드는 것은 물론 판매도 겸하는 곳이었다. 또 플로랑스 지방 최초의 시계 학교이기도 했다.
파네라이가 이탈리아 궁정 해군 레지아 마리나 Regia Marina의 장비 공급사가 된 건 1900년의 일이다. 창립자의 손자이며 3대 오너이자 뛰어난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귀도 파네라이 Guido Panerai가 파네라이에서 만든 시계 및 정밀 기기들로 이탈리아 해군들을 매료시켰다.
파네라이는 이탈리아 해군의 비밀 공작소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암약했다. 파네라이가 시계 외에 심도계, 수중 나침반, 수중 기압계 등 해군 장비 제작에 능한 것도 이러한 역사를 거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해군 역사 기록보관소 기록에 의하면 시계의 경우, 해군은 1936년 파네라이로부터 열 가지 타입의 시계를 제공받아 시험 사용했다. 이들 시계는 1938년 보급형으로 제작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특수부대원 장비로 사용됐다.
당시 이탈리아 해군에 납품했던 파네라이 시계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이는 현재에도 상당 부분 이어져 파네라이 시계의 아이코닉 디자인이 되고 있다. 이탈리아 첫 잠수함 부대를 위해 제작된 라디오미르 Radiomir 프로토타입의 특징인 빅사이즈 스틸 쿠션 케이스(47mm)와 와이어 루프 스트랩 부착장치, 넓은 방수 스트랩 등이 그 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파네라이는 해군 특수부대 시계 제작을 계속했다. 1956년에는 이집트 해군을 위해 라디오미르 이지비아노 Radiomir Egiziano 시계를 개발했다. 이 시계는 오버사이즈 수준의 큰 직경(가장 큰 모델은 60mm에 이르렀다)에 잠수시간 계산 기능과 200m 이상 잠수 기능을 갖춘 최첨단 시계였다. 파네라이는 같은 해 다이버 시계용 크라운 잠금 브릿지를 특허 신청할 정도로 당시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크라운 잠금 브릿지는 루미노르 Luminor 모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1972년은 파네라이 브랜드에 있어 대전환의 해였다. 귀도 파네라이의 아들이자 4대 오너인 주세페 파네라이 Giuseppe Panerai가 죽고 가족 경영체제가 끝난 해이기 때문이다. 파네라이가 가지고 있던 역사와 기술은 당시까지도 이탈리아 해군의 기밀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기업은 공개입찰 대신 파네라이의 엔지니어이자 이탈리아 해군 기술자 출신인 디노 제이 Dino Zei 경영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파네라이가 이탈리아 해군 기밀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1993년의 일이다.
파네라이라는 브랜드가 세상에 공개되자 세계 시계사는 일대 진통을 겪었다. 파네라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 최초의 방수시계는 1926년 롤렉스의 오이스터 Oyster, 세계 최초의 다이버시계는 1953년 블랑팡의 피프티 패텀즈 Fifty Fathoms로 공인되고 있었다.
하지만 1936년 파네라이가 이탈리아 해군 특수 부대에 제공한 10가지 타입의 시계 중 다이버시계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결국 시계 역사는 수정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특수목적용 다이버 시계는 파네라이가 1936년 (비밀리에) 제작한 시계로, 세계 최초의 모던 다이버 시계는 1953년 블랑팡의 피프티 패텀즈로 정리 되었다. 파네라이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중 200미터까지 잠수가 가능한 시계를 생산할 정도로 다이버시계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했다. 파네라이 다이버시계에선 이미 1940년대 초에 특수 레버 브릿지 장치가 사용되고 있었다. 파네라이가 크라운 잠금 브릿지로 특허를 신청한 게 1956년의 일이니, 당시 세간에 공개하지 않았던 파네라이의 다이버시계 기술력 일부는 타 브랜드보다 10여 년, 혹은 그 이상 앞서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파네라이의 앞선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례가 라디오미르와 루미노르 염료 물질의 발명이다. 파네라이 아이코닉 모델들의 이름이기도 한 라디오미르와 루미노르는 시계의 가독성을 위해 개발된 라듐 및 삼중수소 계열의 특수 발광 물질이다. 이들은 둘 다 파네라이의 이름으로 특허등록 되어 있다. 라디오미르는 1916년 개발돼 1949년 루미노르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되다가 이후엔 전부 루미노르로 대체됐다. 하지만 시계 모델의 이름을 뜻하는 라디오미르, 루미노르는 현재까지도 파네라이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93년간이나 이어진 이탈리아 해군 특수 공작소 활동은 파네라이의 브랜드 활동에 있어서 양날의 검으로 평가 받는다. 국가의 기술적 지원에 힘입은 신기술 획득이나 안정된 판로는 파네라이의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하이엔드 워치 관계자들 중 일부는 ‘파네라이는 오피시네였을 뿐 오롤로지는 아니었다’는 이유로 이때의 활동을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공작소에서 만들던 여러 군사 용품 중 하나가 시계였을 뿐 시계 전문 제작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실제로 파네라이가 이 시기 제작한 시계의 총 개수는 500여 개를 넘지 않는다. 1960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 중 일부는 연 생산량이 20만 개를 넘어설 정도였기 때문에 파네라이가 수십 년간 공작소 활동을 하며 만든 시계 수는 다른 시계 브랜드의 하루 생산량보다 못한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를 장점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바로 희소성 때문이다. 극강의 기술력에 희소성까지 갖춘 시계이다 보니 공작소 시절 만들었던 파네라이 시계는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시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명품 시장에서 희소성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기 때문에 파네라이는 자사의 희소성 이미지를 오히려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정체성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파네라이는 현재 아주 잘나가는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가 되었다. 리치몬트 그룹에서 파네라이를 인수한 것이 1997년이고 파네라이가 국제시장에 새롭게 론칭된 게 1998년이니 파네라이는 불과 16년 만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하이엔드 워치브랜드가 된 셈이다.
다이얼의 심플함, 오직 남성 모델만을 고집하는 전통, 희소성, 스트랩 교체의 용이성, 유일한 이탈리안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 리치몬트 그룹의 지원 등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로서 파네라이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론 뭔가 부족한 감이 있다. 베일에 가려졌던 93년간의 역사와 오피시네로서의 활동을 논하지 않고선 진정한 파네라이를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오피시네 기간 동안의 활동은 파네라이 성공의 진정한 핵심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 시기의 정체성 논란 자체가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들 중에서도 파네라이를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의 주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 정체성 논란이 계속되는 한 파네라이의 인기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