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잡는 화학적 지문
미세증거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현미경, 돋보기 등의 장비를 이용해야만 확인할 수 있는 범죄 증거를 말한다. 모발과 흙, 페인트·섬유·플라스틱·유리 조각 등이 여기에 속하며 지문, 족적, 혈흔 등과 달리 눈에 잘 띄지 않아 범인이 간과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때문에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미세증거물들은 사건 해결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같은 미세증거물의 경우 일반 증거물보다 분석이 쉽지 않다는 것. 동위원소나 미량원소에 대한 정밀 분석이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 구축이 요구된다. 미세증거물을 '화학적 지문'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환경과학연구부 류종식 박사팀과 생명과학연구부 최종순 박사팀이 첨단장비를 활용해 미세증거물의 활용도와 분석의 정확도를 대폭 향상시키는 첨단과학수사 분석기술을 연구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뺑소니 사고 검거율 100%를 향해
류 박사팀은 현재 유리와 거울조각만으로 자동차의 차종과 연식을 정확히 알아내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 생산된 자동차용 유리와 거울이 제조사나 생산공정에 따라 구성물질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류 박사는 “결정화 과정 없이 단단하게 냉각된 융합무기물인 유리는 미량원소를 포함, 약 30여종의 물질로 구성돼 있다”며 “제조사나 제조공정별 미량원소에 차이가 발생하므로 작은 유리조각 하나로도 차종과 연식의 확인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를 위해 국내 5대 완성차 메이커에서 사용 중인 자동차 옆 유리 36종과 사이드미러 120종을 분석했다. 각 제품을 파쇄해 표면의 불순물을 완벽히 제거한 뒤 레이저 삭박 유도결합 플라즈마 질량분석기에 넣은 결과, 자동차 회사마다 납(Pb) 동위원소 조성비에 큰 차이가 있음이 확인됐다. 각 유리와 거울의 제조사별 차이도 명확했다.
류 박사는 “자연계의 납 동위원소는 208Pb·207Pb·206Pb·204Pb 등 4종이 존재하는데 이번 연구를 통해 완성차 메이커별, 유리·거울 제조사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며 “유리와 거울조각은 차량사고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미세증거물이기 때문에 매년 1만1,000건 이상 발생하는 뺑소니 사고 등의 해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망시간 알려주는 종이 칩
최 박사팀의 경우 살인사건 피해자, 즉 시신의 사후경과시간(PMI) 판정기술 개발에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PMI를 정확히 알아내면 피해자의 사망추정시간에 맞춰 용의자의 범위를 압축, 신속한 수사진행이 가능하지만 현재는 체온, 혈액 침하, 사체 경직, 부패 등 주변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요인들에 의존하면서 정확성에 한계가 존재한다. 이에 연구팀은 오랜 연구 끝에 흰쥐의 장기에서 시신의 장기나 체액으로 PMI를 객관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생화학적 마커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 마커를 바탕으로 사건 현장에서 손쉽게 사용 가능한 종이소재의 PMI 진단 키트를 개발하고 있다.
이 키트는 임신진단 키트처럼 칩에 체액을 떨어뜨리면 10분 이내에 결과가 나타나는 방식으로 구동된다. PMI 다중 단백질 마커들의 존재 유무로 PMI를 추정하는 메커니즘이다. 최 박사는 “현재 국내의 PMI 판정 기법은 법의학자의 개인적 경험에 많이 좌우돼 정확성이 떨어지는 편”이라며 “향후 PMI 진단 키트 개발이 완료돼 본격 보급되면 살인사건의 초동과학수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기초지원연의 첨단과학수사연구 사업책임자인 이광식 선임본부장은 “첨단과학수사연구는 신속·정확한 사건 해결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안전한 사회를 구현하는 국민 친화적·사회 친화적 과학기술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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