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계를 대표하는 브랜드 로만손과 자매 브랜드 제이에스티나. 이들은 진입장벽이 높기로 유명한 명품 시계 시장에서 어떻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까?
글 정경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장
최근 뉴욕 5번가의 플라자호텔을 방문했을 때, 티아라(왕관형 머리 장식)가 있는 낯익은 로고를 만났다. 한국의 고급 액세서리 브랜드인 제이에스티나 J.ESTINA의 쇼룸 겸 매장이었다. 10년 전 서울 강남대로에 처음 개점했을 때 테이프 커팅을 했던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대형 유리 상자 같은 건물로 유명한 애플의 5번가 매장 바로 맞은편에 있는 부티크 호텔에 쇼룸을 연 것은 “제이에스티나가 곧 명품 브랜드구나!”라는 생각을 갖게한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국산시계 처음 ‘로만손’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느 나라 회사인가?” 하는 궁금증이 든다. 스위스의 시계 공업단지 마을인 ‘로만시온 Romancion’에서 유래된 로만손은 1988년 김기문 회장(현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에 의해 시계전문업체로 설립되었다. 그 당시 김 회장이 시계 산업에 뛰어든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시계가 고가 예물로 간주되어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한 데다, 국내에서 는 오리엔트, 아남, 삼성, 한독 등 4대 시계회사는 물론 많은 업체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만손은 손쉬운 OEM(저가로 제품을 만들어서 주문자가 원하는 상표를 부착하여 수출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해외 전시회에 참가하여 외국 구매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방식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김 회장은 디자인과 기술력이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신념으로 자체 디자인 능력과 기술 개발을 위해 매출의 10퍼센트를 투자했다. 세계 최초로 유리 표면을 다이아몬드 형상으로 세공한 커팅 글라스 워치를 개발한 데 이어 국내 처음으로 두께 3.89㎜의 초박형 슬림 워치 등을 상용화했다. 또한 자체 디자인실을 설치하여 국가별 트렌드를 신속히 파악하고 맞춤형으로 개발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디자인이 독특한 시계를 저렴한 가격에 계속 공급함으로써 ‘시계는 패션 상품’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도모하며 지속적으로 국내외 시장에서 매출을 늘려나갔다. 그 결과 1990년대 초반부터 두바이를 필두로 중동과 러시아 등에 수출하여 로만손은 ‘해외에서 더 유명한 회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듀얼 브랜드 전략 추진
1990년대 후반부터 로만손은 시계 이외에 주얼리와 핸드백 등 고급 액세서리 부문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한때 대표적인 귀중품이었던 시계가 패션 아이템으로 대중화됨에 따라 점차 수익성이 낮아지는 반면, 국민소득의 증대로 주얼리 부문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오랜 준비 끝에 2003년 초에 첫선을 보인 ‘제이에스티나’라는 브랜드 네임은 티아라와 제니(고양이)를 좋아했던 이탈리아의 공주 ‘조반나 에스티나’(훗날 불가리아 왕비)에서 유래하였다. ‘공주, 왕비, 타아라, 고양이’ 등은 모두 주얼리를 애용하는 주요 고객층의 마음에 다가가는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적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한 예로 ‘피겨 스케이팅의 여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2013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는 시상식에서 티아라 귀걸이를 착용해 주목을 받았다. 로만손이 김연아를 제이에스티나의 모델로 선정한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브랜드 콘셉트인 ‘여왕(Queen)’이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특히 김연아 선수가 무명 선수시절부터 세계 최고로 성장해온 과정이 제이에스티나가 브랜드 비전을 달성하려는 노력과 일맥상통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로만손이 리듬체조의 유망주인 손연재를 무명시절부터 지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12년 현재 로만손의 총매출액 1,223억 원 중 주얼리와 핸드백에 주력하는 제이에스티나가 74.5%, 로만손 시계가 24.5%를 점하고 있어 로만손의 ‘듀얼 브랜드 전략(Dual Brand Strategy)이 성공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300여 명의 본사 근무 직원 중 48%가 제이에스티나 부문에서 일하고 있으며, 나머지가 로만손 시계와 경영지원 인력이다.
브랜드별 특화 디자인 개발
경쟁 상대와 확연히 다른 창의적인 디자인만이 고객에게 선택된다는 것은 시계와 주얼리 부문이 크게 다르지 않다. 로만손 경영진이 디자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시계든 주얼리든 디자인에 의해 그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김기석 로만손 사장은 “브랜드의 혼과 정체성이 배어 있는 독창적인 디자인은 그 어떤 마케팅 수단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확신을 갖고 디자인 개발을 독려하고 있다.
로만손시계와 제이에스티나는 같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어도, 제품 속성이 다른 만큼 디자인 개발도 별도의 조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로만손시계의 디자인실은 실장 1명, 6명의 디자이너, 6명의 개발엔지니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디자인을 회사 내에서 개발한다.
디자인 프로세스의 초기에는 시즌별 국내외 시장조사로 각국 트렌드와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여 디자인 개발 방향을 세운다. 이어 제품 콘셉트를 정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2D와 3D 렌더링으로 제품을 구체화시킨 다음, 3D데이터를 연구소로 보내 모형을 제작하여 최종 품평회를 개최한다. 각 사업부 구성원 전원이 참여하는 소비자 만족도 설문을 반영하여 제품의 양산 여부가 결정된다. 반면에 제이에스티나는 내부 디자인과 아웃소싱을 병행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주로 ‘마릴리사 젠’ 등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에게 의뢰하여 제품을 개발했다. 그런데 한국의 소비자들이 이탈리아제 디자인을 덜 선호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서는 자체 디자인 비중을 높여나갔다. 예를 들면 금도금의 경우 이탈리아에서는 진한 색상이 선호되지만, 한국 소비자들은 연한 색상을 더 좋아하는 등 문화적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현재 주얼리 디자인실에는 실장 1명, 5명의 디자이너, 2명의 엔지니어 등 모두 8명이 일하고 있다.
주얼리 디자인 프로세스의 특성은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즉 신제품을 디자인할 때, ‘조반나 에스티나 공주 또는 왕비라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생활할까?’라는 가정에 맞추어 시뮬레이션 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면 ‘에스티나 왕비가 뉴욕의 파티에 초대받았다면 어떤 액세서리가 좋을까?’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독창적인 콘셉트가 만들어지고 일관성도 유지될 수 있다.
화장품을 겨냥하는 멀티 브랜드 전략 추진
최근 로만손은 더욱 더 폭넓은 다변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제이에스티나 핸드백 부문은 2012년 246억 원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 올해는 450억 원을 목표로 하는 등 제3의 ‘캐시 카우 Cash Cow’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어로 ‘나’를 의미하는 ‘쥬 Je’라는 프리미엄 천연 향수 브랜드가 금년 하반기에 출시된다. 프랑스 향수전문업체인 ‘퍼미니쉬’와 합작하고 있는 향수제품은 8종이며, 모두 천연 원료만을 사용하여 인공 향수와 차별화하고 있다. 용기와 포장 등은 프랑스에서 디자인되고 있지만 로만손 특유의 스토리텔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김기석 사장은 “내년에는 고급 화장품 브랜드도 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업계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로만손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정경원 교수는…
한국 디자인 진흥원장을 역임한 정경원 교수는 국내 산업디자인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 본부장(부시장)을 지냈으며 현재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