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중심으로 살던 남편 혹은 부인이 은퇴 후 가정으로 돌아오면 새로운 부부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은퇴설계란 부부관계의 회복설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재룡 한국형 은퇴설계연구소 소장
중소기업에서 은퇴한 A씨가 찾아와서 이런저런 노후준비에 대한 상담을 했다. 재산은 그럭저럭 노후생활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다. 재산의 구조만 약간 바꾸면 별무리 없이 지낼 수 있는 노후가 가능할 듯했다. 하지만 골프, 해외여행, 친구들과의 교류만으론 인생을 살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평생을 과도하게 일하며 살아온 우리나라 중장년층의 평균적인 모습이 이런 것 아닐까.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그들은 자신의 정열을 쏟을 곳이 없다는 불만 또한 가득하다. 부부관계도 매우 자신 없어 한다. 이렇게 되면 노후생활이 결정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은퇴란 반평생 직장에서 활동을 하던 남편 또는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를 중심으로 한 생활에서 벗어나 부부중심의 생활이 시작되는 시기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생 조직에서 활동해오다가 갑자기 은퇴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부부관계와 자녀관계가 서먹서먹하기 짝이 없다. 남편의 경우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면 자신감도 없어진다. 부인과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마땅히 관계를 개선할 방법도 잘 모른다. 그래서 은퇴 후 부부생활 관리는 행복의 출발점이 된다. 어쩌면 은퇴설계란 부부관계의 회복설계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베이비 부머들의 부부관계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매우 만족한다’가 9.1%, ‘만족한다’가 62.0%, ‘보통이다’가 26.3%로 나왔다.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는 응답이라 할 수 있다. 불만족자는 2.7%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분석해보면 남성들보다 여성의 만족도가 떨어진다. 매우 만족한다는 비율이 낮은 것도 문제점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대충 만족하고 산다는 비율이 62%에 달한다는 건 우리나라 중장년층들의 부부관계 만족도가 높지 않다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은퇴한 남편의 다양한 증세들
오랫동안 조직형 인간으로 살아온 남편은 회사에서 벗어난 후 여러 가지 증세를 보이게 된다. 집에서 쉬면서 갑자기 노화증세를 보이거나 극심한 부부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른바 은퇴 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라는 심각한 병이다. 남성 호르몬보다 여성 호르몬의 분비량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면서 아담증후군(Adam syndrome)이라는 신체적·정신적 변화도 시작된다.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잔소리가 심해지는 행동이 대표적인 증세다. 동시에 탈진증후군(burnout syndrome)에도 시달린다. 권위와 명예를 모두 상실한, 마치 삶이 끝난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남편은 부인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은퇴 후유증이 크다는 건 그만큼 집보단 외부로 돌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아직도 공부를 끝내지 못했거나 결혼을 하지 못한 경우, 부인과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다. 노후 자금마저 부족하면 사태는 조금 더 심각해진다. 결국 은퇴는 남편과 부인 모두에게 심각한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남편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자
지금 50~60대 남자들은 대개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력투구를 해왔다. 자연스럽게 투쟁적인 경쟁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대화에 익숙하지 않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부부관계나 자녀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 골프를 쳐도 전투적인 내기 골프에 익숙하며, 혼자서 자아성찰을 하는 일은 서툴기 짝이 없다. 상하관계가 엄격하고, 달성해야 할 목표가 명확한 조직 속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이런 남편의 인식구조와 행동양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인들이 많다. 집게손가락으로 부인이나 자녀를 가리키면서 ‘너(you)는 왜 이래’ 하는 식으로 발언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있는가? 물론 자신을 가리키면서 ‘나(I)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발언하는 남편이 되면 백점 만점일 것이다. 행복한 은퇴자를 만나보면 남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부인과, 그 부인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소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남편이 서로를 배려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경우가 많다. 부부관계는 어느 한 방향의 문제가 아니고, 누구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노력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부부 모두의 노력이 중요하다.
부부관계가 은퇴설계의 핵심이 된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니 각종 책과 언론매체에서 ‘~하라’식의 부부관계 개선책이 쏟아져 나온다. 부부관계의 소홀함을 지나치게 폄하할 필요는 없다. 평생을 일 중심으로만 살아온 탓에 베이비 부머들이 어쩔 수 없이 겪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부터 부부가 합심해서 은퇴 후 남은 30~40년을 진심으로 동행할 수 있는가 여부이다. 부부가 힘을 합쳐서 노력하면 자신들만의 해결책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 지나치게 남발되고 있는 ‘~하라’식의 노력이라도 몇 가지 시도해보자. 그러면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행, 자기계발, 취미생활, 운동, 문화활동 등을 함께 하면서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소망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장단기 계획을 세우면 된다. 굳이 부부간 갈등이나 불만을 증폭시킬 필요는 없다. 부드러운 대화 속에서 얼마든지 서로를 알아내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일생 동안 조직생활을 해온 남편들은 회사에서 경청, 소통, 설득, 문제해결 기법들을 숱하게 익히고 실천해왔다. 부부관계는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조금만 노력하면 될 것 같지 않은가? 남자들이 회사 일은 자신 있고 부부관계 개선은 자신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고객과 직원들에게 쏟은 자신의 정열 중 일부분만 부부관계에 쏟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괜히 감정을 내세우고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끄집어면서 지레 포기하거나 자신 없어 하는 건 부부관계 개선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은퇴설계의 핵심은 부부관계
부부가 협력해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선 가장 먼저 부부 모두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은퇴 후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선 남편들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컨대 부인이 집안일에서 은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남편들이 회사에서 은퇴하듯이 아내도 집안일에서 조금은 해방되어야 한다. 식사, 청소, 집안 정돈, 자녀 챙기기 등 모든 일을 부부가 동일하게 같이 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의 저자 소노 아야코는 “나이가 들면 ‘남이 주는 것’ ‘남이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라”고 강조한다. 부하직원과 비서, 내조를 잘 해주는 부인에게 둘러싸여 지내왔던 남편들은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몸소, 혹은 부부가 같이한다는 사고를 가져야 한다. 부인 역시 평생을 회사와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은퇴한 남편에게 어떤 것을 해줄까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은퇴한 남편에게 한 가지 멋진 선물을 준비하는 건 어떨까? 남편에게 묻지 말고 은퇴 후 새로운 삶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선물을 준비해 보길 바란다.
다음으론 자녀중심의 사고방식을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 부부 중심의 삶이 아닌, 오로지 자녀 위주의 삶을 사는 노인 가구를 주위에서 많이 본다. 하지만 자녀와 손주들이 부부관계의 중심에 있으면 곤란하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내 곁에서 나의 손을 잡아줄 배우자가 최고의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손을 꼭 잡고 이해와 관용으로 삶의 여정을 동행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은퇴설계가 완성된다. 행복한 인생 2막은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다.
우재룡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펀드평가대표이사, 동양증권 자산관리컨설팅연구소장,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을 거쳐 현재 한국형 은퇴설계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