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유럽, 일본이 저성장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언제 이 늪에서 헤어날지도 지금으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지 못하면 조만간 젊은이와 기성세대가 일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시대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도 이젠 전 세계적으로 공급과잉인 철강, 화학, 자동차, 기계, 반도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 스마트와 그린산업에서 승부를 걸지 않으면 장기 저성장은 불가피해 보인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요즘 숫자로 나타난 경기지표를 보면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경기 회복이 뚜렷해 보인다. 비결은 무엇일까?
돈을 푼 쪽은 경기가 살아나는 듯 보이고, 돈 푸는 데 주저한 나라는 아직 경기회복 소식이 멀게만 들린다. 최근 수년간의 상황을 살펴보면 세계를 좌우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각국 대통령들이 아니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의 벤 버냉키, 유럽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 같은 중앙은행장들이다. 물가와 화폐가치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중앙은행장들이 경기를 논하고 정치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돈을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화폐 인쇄기가 멈췄을 때 과연 선진국 경기가 자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2009년 이후 미국이 그렇게 돈을 퍼부었는데도 고용 창출과 경기 회복 속도는 더디기 그지없다.
역사상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이전을 완료한 나라 가운데 다시 2차 산업으로 회귀한 나라는 없다. 제조업이 해외로 나가 버리고 서비스산업만 남은 소비대국 미국에서 새로운 산업이 나타나기 전에는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기 어렵다. 공공부분에서 고용을 늘리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재정절벽’에 봉착한 미국이 그런 일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고용지표가 개선되었다곤 하지만 노동참가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음식쿠폰(food stamp)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는 (우리로 치면 생활보호대상자다) 인구가 이미 4,600만 명을 넘어섰다. 게다가 2011년 이후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경기가 회복하고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근접해 가는데도 음식쿠폰이 없으면 밥 못 먹는 사람이 계속 늘어난다는 건 ‘달러 찍는 프린터로 만든 경기회복’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의미다.
지금 세계경제의 3대 축인 미국, 유럽, 일본이 모두 ‘부채의 덫’에 걸려 있다. 서방세계는 빚을 줄여야 하는 디레버리징에 들어가 있고, 금융위기에서 한발 비껴나 있는 중국은 고도성장의 후유증인 빈부 격차, 도농 격차, 산업 간 격차를 조정해야 하는 리밸런싱에 돌입해 있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저성장 국면에 들어간 건 확실해 보인다.
선진국은 1% 성장, 한국은 2% 성장의 덫에 걸려 있다. 신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심각한 상황에 빠질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다. 파생상품과 과도한 레버리지가 만든 불장난이 제1차 ‘99%들의 시위’와 ‘재스민 혁명’을 불러왔다. 초저성장의 그늘은 바로 청년실업이다. 1~2%대 성장이면 실업대란은 불가피하고 그러면 정책실패에 항의하는 제2차 ‘99%들의 시위’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면 재스민혁명은 중동이나 아프리카가 아니라 서방 국가에서 터질 가능성이 더 크다.
디레버리징의 덫에 걸린 세계가 구조적인 저성장으로 가면 젊은이와 기성세대가 일자리를 두고 다투는 시대가 오고 일자리가 없어진 젊은 세대들은 해외로 탈출하게 된다. 거기에 복지국가를 만들겠다고 어설프게 부자들의 지갑을 털면 돈은 국가를 떠나고 사람도 이민 가는 일이 생긴다.
요즘 남유럽 젊은이들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공부를 한다고 한다. 유럽에서 가장 경기가 좋은 독일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독일어 학습 열풍이 남유럽 젊은이들 사이에 분 것이다. 프랑스에선 부자들이 세금 때문에 프랑스 국적을 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에는 영원한 강대국이란 없다. 세계의 패권이 동서양을 오가며 역사의 중심고리 역할을 했다. ‘풀 먹는 말(馬)’이 ‘석탄 먹는 말(증기기관)’로 바뀌고, 다시 ‘석유 먹는 말(자동차)’, ‘전기 먹는 말(IT)’로 바뀐 것이 기술의 역사다. 역사적으로 말(기술)이 바뀔 때마다 금융위기가 있었고 결국 신기술과 돈이 결혼해 세계가 호황을 누렸다. 신기술과 돈이 이혼할 땐 다시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이번 금융위기가 ‘전기 먹는 말’이 그 수명을 다하고 새로운 말이 등장할 것이란 사실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전기 먹는 말’ 다음에 등장할 신기술을 주도하는 나라가 바로 패권을 차지할 것이고 여기서 대박을 내는 이가 거상이 될 것이다. 전기 먹는 말 다음에는 ‘태양을 먹는 말’이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바로 ‘스마트그리드와 그린산업’이다. 한국도 이젠 전 세계적으로 공급과잉인 철강, 화학, 자동차, 기계, 반도체에서 벗어나 스마트와 그린산업에서 승부를 걸지 않으면 장기 저성장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금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에선 M(Management·경영)을 배우지 말고 C(Chinese·중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농담이 유행한다고 한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의 최대 장기는 성공한 미국 기업 사례를 연구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이것을 전 세계 기업인들에게 팔아 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금융위기 이후 성공사례를 분석할 만한 기업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애플 정도가 그나마 성공 케이스로 꼽을 만하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돈을 쓸어 담고 있는 애플은 미국에선 단 한 대의 아이폰도 만들지 않는다. 아이폰은 중국에 있는 핸드폰 제조 OEM업체 팍스콘이 전량 생산한다. 따라서 애플의 성공사례를 분석하려면 대만계 중국 기업인 팍스콘을 들여다봐야 한다.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애플의 성공사례 분석이 어렵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디레버리징의 덫에 걸린 선진국은 수요 부족에도 허덕이고 있다. 내수가 살아 있는 신흥 시장 외에는 성장 공간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신대륙이다.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 후 유럽은 200년 동안 호황을 누렸다. 중국은 2,000년간 우리 옆에 있다가 지금 제 발로 세계최대 소비재 시장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 지금 중국은 매년 740만 채 주택을 짓고, 자동차 1,900만 대를 산다. 집과 자동차를 사고 나면 다음은 모피 코트, 와인 같은 고급 소비재 시장으로 돈이 몰리게 되어 있다.
남들이 못하는 것, 안 하는 것으로 승부를 걸지 않으면 글로벌 공급과잉의 저성장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기득권의 마약에 취해 있으면 위기에서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구조적인 저성장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스마트와 그린산업, 그리고 중국 시장 적응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디레버리징의 덫에 걸린 선진국은 수요 부족에도 허덕이고 있다. 내수가 살아 있는 신흥 시장 외에는 성장 공간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신대륙이다.
전병서 소장은…
대우증권 리서치본부장과 IB본부장을 역임했다. 한화증권 리서치본부장을 거쳐 현재 경희대 경영대학원 중국경영학과 객원교수,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 칭화대 경제관리학원(석사), 푸단대 관리학원(석사·박사)에서 공부한 그는 현재 중국 자본시장 개방과 위안화 국제화, 중국 성장산업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저서로는 ‘금융대국 중국의 탄생’, ‘5년 후 중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