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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L의 헬멧 전쟁

THE HELMET WARS

매년 미국에서만 380만명의 운동선수들이 경기 중, 혹은 연습 중에 뇌진탕 사고를 당한다. 기존의 헬멧 제작사들 이 이 문제의 해결에 미적거리는 동안 스웨덴의 연구팀이 뇌진탕으로부터 선수의 뇌를 방호해줄 최종 병기를 찾아냈다.

story by Tom Foster
photographs by Travis Rathbone


2012년 8월 19일. 미국 프로풋볼리그(NFL)인디애나폴리스 콜츠팀과 피츠버그 스틸러스팀의 프리시즌 경기가 열렸다. 이날 콜츠팀의 공격에서 오스틴 콜리 선수가 스크리미지 라인 의 17야드 앞으로 달려 나가 쿼터백이 던진 공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스틸러스팀 아이크 테일러 선수의 태클이 들어왔고, 그는 콜리 선수의 목을 팔로 감아 오른쪽으로 꺾어 내렸다. 동시에 또 다른 스틸러스팀 선수인 래리 푸트가 반대편에서 달려와 팔꿈치로 콜리 선수의 헬멧 오른쪽을 가격했다. 순식간에 두 명의 태클을 받은 콜리 선수는 푸트 선수의 무릎에 머리를 부딪친 뒤 지면에 처박혔다.

콜리 선수는 멍한 상태로 일어나 앉았다. 잠시 후 부축을 받으며 필드를 떠난 그는 3주간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진단명은 외상성 뇌손상. 우리가 흔히 말하는 뇌진탕이었다.

콜리 선수가 경기 중 뇌진탕을 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11월 7일 열린 경기에서도 두 명의 필라델피아 이글스팀 선수에게 동시에 태클을 당하며 10분이나 꼼짝 못하고 누워있었던 적이 있다. 다행히 치료를 받고 2주일 뒤에 다시 필드에 섰지만 그 경기에서 또 뇌진탕을 입고 세 경기를 쉬어야 했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세 번째 뇌진탕을 겪으며 시즌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포지션에 따라 다르지만 NFL 선수 한 명은 한 시즌동안 1,500회나 머리에 충격을 받는다. 10년차 선수라면 무려 1만5,000번의 충격을 받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교나 대학 선수 시절 받았을 충격은 제외하고도 말이다. 또한 뇌진탕은 NFL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스하키, 라크로스, 심지어는 사이클과 스노보딩 같은 스포츠들도 위험에 노출돼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처럼 두부에 가해진 충격은 영구적 뇌손상을 남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자료를 보면 미국에서 뇌진탕을 입는 운동선수의 숫자가 연간 38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프로선수와 아마추어, 아동들도 포함된 수치다. 게다가 헬멧 제조사와 과학자들의 오랜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는 별달리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지난 2년간 스포츠 경기에서 빈발하는 뇌진탕 사고에 대한 대중적 분노는 커져만 갔다. 2011년 1월 미국 상원의원 톰 우달은 연방거래위원회(FTC)에 미식축구 헬멧 업계에 대한 조사를 건의하기도 했다.

현재 관련업계가 추구하는 헬멧 개선은 눈속임에 불과하며, 소비자의 안전 강화 요구를 기만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작년 6월에는 2,000명 이상의 전직 NFL 선수들이 공식 헬멧 공급업체인 리델과 NFL 사무국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내기도 했다. 이들이 뇌손상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애매모호하게 희석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전문가들은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이 소송의 결론이 나오려면 수년간 수십억 달러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NFL 선수들은 매년 1,500회 정도 머리에 충격을 받는다. 경력 10년차라면 무려 1만5,000회의 충격에 노출된 셈이다.

이 같은 헬멧의 안전성과 관련한 모든 이슈의 근원은 한가지로 모아진다. 사람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뇌진탕과 뇌손상이 선수의 목숨과 직결돼 있다는 것은 지난 2006년 필라델피아 이글스팀의 스타 선수였던 안드레 워터스의 총기 자살 사건이 극명하게 말해준다. 워터스 선수의 뇌를 부검한 결과, 그가 치매를 유발하는 뇌손상인 만성외상성뇌병증(CTE)에 시달렸음이 확인된 것. CTE의 원인은 반복적인 두뇌 충격이다. 이외에도 데이브 듀어슨, 레이 이스터링, 주니어 서 등의 선수가 NFL을 은퇴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상황이 이런 만큼 NFL 장비제조업계에는 헬멧의 안전성을 높이라는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빗발쳤다. 그리고 기존 기업들은 물론 다수의 신생기업들이 이 목소리에 부응해 새로운 설계의 헬멧을 내놓았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제품이 가장 안전하다고 선전했는데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헬멧 개발에 활용된 각 기업들의 연구결과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 연구 중 상당수는 헬멧 제작사 또는 NFL의 직·간접적 자금지원을 받았다. 내용이나 수치의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게 정상이다.

때문에 선수와 코치, 운동선수를 둔 부모들은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서도 언급했던 이 모든 노력과 대중적 분노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부상은 여전하다.

스크리미지 라인(scrimmage line) 미식축구에서 플레이를 시작하기 전 양팀 선수가 공을 사이에 두고 일렬로 대치하고 있는 라인.




충돌 과학
새로 출시된 헬멧들은 어떤 점이 나아졌을까.






리델 360
1989년 이래 NFL의 공식 헬멧 공급업체인 리델이 2011년 출시한 모델. 헬멧 정면과 측면에 충격흡수 패드가 추가됐으며 별도의 패드를 통해 뇌진탕 방지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패드를 추가하는 것만으로는 뇌진탕의 핵심원인인 회전가속 충격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riddell.com



제니스 X2
발포재 패딩 대신 공기를 채운 실린더를 채용했다. 충격이 가해지면 작은 구멍에서 공기가 배출되며 충격을 흡수하는 원리다. 충격이 사라지면 실린더는 원래의 상태로 복귀, 다음 충격에 대비한다. 강한 충격과 약한 충격 모두에 대응하는 적응형 패드를 썼지만 회전가속 충격에는 별반 효과가 없다. xenith.com



셔트 이온 4D
열가소성 플라스틱 우레탄으로 쿠션을 제작, 어떤 기후에서도 제 성능을 발휘한다. 뇌진탕 위험성 저감 설계도 채택됐지만 회전가속 충격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제작사는 2011년 홍보영상을 통해 다수의 작은 충격이 한 번의 큰 충격만큼 위험하다는 주장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schuttsports.com



롤링스 퀀텀 플러스
야구 헬멧 제조회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롤링스가 내놓은 미식축구용 헬멧. 뇌진탕을 막아준다는 일명 '대량 상쇄(largeoffset)' 설계가 이뤄졌다. 이는 착용자의 머리와 헬멧 외피에 가급적 넓은 공간을 확보, 더 많은 충격흡수 패드를 삽입하는 설계 기법이다. rawlingsfootball.com



SGH 헬멧
자칭 '안전의 대부'라고 말하는 모터스포츠 장비업계의 전설인 빌 심슨이 설립한 SGH의 작품. 외피를 고강도·고경량 케블라 섬유와 탄소섬유로 제작함으로써 시중에 출시된 헬멧 중 가장 가볍기로 유명하다. 충격 흡수 패드에 한 겹의 복합재가 들어있는데 그 성분은 특허 획득 전까지 비밀이라고 한다. sghelmets.com



POC벤터스 가디언 캡
표준형 헬멧 위에 덮어 쓰는 패딩형 외피. 일각에서는 헬멧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이 외피가 상대선수의 헬멧 등에 걸려 목 부상을 일으키며 회전가속 충격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설계자인 리 헨슨은 충격에 의해 외피가 벗겨진다고 설명한다. 어쨌든 그리 폼 나는 디자인은 아니다. guardiancaps.com


뇌진탕과의 전쟁

현재 출시된 헬멧들은 도대체 왜 뇌진탕을 더 효과적으로 줄이지 못하는 걸까. 이를 이해하려면 뇌진탕의 속성부터 알아야 한다.

뇌진탕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현존 최고의 뇌 이미징 기술로도 뇌 조직 손상의 징후를 진단해내기 어렵다. 그래서 뇌진탕의 진단은 철저히 환자의 증상과 부상이 일어난 과정에 의존한다. 어지럽거나 정신이 혼란스러운지, 때때로 의식을 잃지는 않는지, 두통이나 메스꺼움을 느끼는지, 부상당한 과정을 기억하는지,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등이 판단 기준이다.

그나마 의사가 뇌진탕을 정확히 진단했더라도 치료는 별개의 문제다. 제대로 치료하려면 과학자들이 뇌 안의 상황을 훨씬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지난 수세대 동안 뇌진탕은 물리적 충격을 받은 뇌가 두개골과 충돌하면서 회백질이 타박상을 입은 결과로 믿었다. 그러나 진실은 그처럼 평범하지 않다. 뇌진탕은 외부 충격이 뇌의 신경세포 및 신경세포들을 연결해주는 축삭돌기(axon)에 압력을 가하면서 뇌의 깊은 곳에 위치한 백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충격 요법
미국 버지니아텍의 생물의공학자 스테판 두마 박사는 수직낙하[좌측] 및 수평 충격 실험[우측]을 통해 헬멧에 가해지는 힘을 연구한다. 이런 실험은 미식축구용 헬멧의 안전기준을 강화할 기초자료가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알고 싶다면 '선가속 충격'과 '회전가속충격' 의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선가속은 어감 그대로 타격 지점에서 시작해 일직선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머리를 부딪쳐 두개골이 골절된다거나 태클을 당해 뼈가 부러지는 걸 떠올리면 된다. 이와 달리 회전가속은 다소 복잡하다. 각(角) 충격, 즉 뇌에 가해진 힘의 방향이 뇌의 무게중심에서 벗어났을 때 일어난다.

쉽게 말해 선가속 충격은 축구공의 정중앙을 차는 것, 회전가속 충격은 측면을 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축구공(두개골) 속에 핸드볼공(뇌)이 들어있다면 각각의 충격에서 핸드볼공의 움직임은 크게 다를 수 밖에 없다. 미국 보스턴 의과대학의 신경과학자 로버트 캔투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머리에 가해지는 거의 모든 충격은 회전가속 충격이에요. 사람의 머리는 사각형이 아니기 때문이죠."

뇌진탕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는 이게 다가 아니다. 인간의 뇌는 핸드볼공처럼 둥글지 않다. 주름진 데다 비정형적 모양을 가졌으며 젤리 같이 말랑거리기까지 한다.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을 때 뇌의 움직임 역시 일률적이지 않고 비정형적이라는 얘기다.

"선가속보다 회전가속 충격이 뇌에 더 큰 손상을 줍니다. 선가속 충격은 신경세포나 축삭돌기를 늘어나게만 하지만 회전가속 충격은 늘어나면서 뒤틀리게도 하니 손상이 커지는 겁니다."

이쯤에서 생기는 궁금증 하나. 원인을 알아냈음에도 왜 막지 못하는걸까. 이는 회전가속 충격을 받았을 때 실제 인간의 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지 못해서다. 연구를 하려고 멀쩡한 사람에게 일부러 뇌진탕을 일으킬 수도, NFL 선수들의 머리에 온갖 센서를 붙이고 경기에 나가라고 하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지난 2007년 미국 웨인주립대학 연구팀이 시체에 헬멧을 씌우고 여러 각도에서 충격을 가하면서 뇌의 움직임을 고속 X-선으로 촬영한 적이 있다. 이 연구를 통해 강한 충격에서 뇌가 밀리미터(㎜) 단위 정도로 밀린다는 게 드러났다. 별거 아니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이 정도 움직임으로도 신경 기능에 이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뿐 만이 아니다. 인간의 뇌는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며 젊은 뇌와 늙은 뇌,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는 반응 역시 다르다. 몇 차례의 연구로 표준화된 치료법이나 안전한 헬멧을 개발하는 것은 사실상 어불성설에 가깝다.

연구자들은 뇌진탕의 원인이 회전가속 충격에 의한 신경손상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런데 왜 아직 막아내지는 못하는 걸까.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과학자들은 미약한 충격이라도 장기간 자주 노출되다보면 결국 NFL 선수들을 자살로 몰고 갔던 CTE를 일으킬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어떤 충격을 몇 번이나 받아야 그렇게 되는지는 불명확하다. 뇌를 적출해야만 어느 부위의 조직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있어 환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확인이 불가능한 탓이다.

뇌진탕을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헬멧의 개발은 이렇듯 뇌진탕을 둘러싼 과학적 모호성으로 인해 지체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외에도 헬멧 기술의 발전을 막는 장벽은 또 있다. 그중에서도 헬멧 업계가 자율적으로 준수하고 있는 안전기준이 시대에 심하게 뒤쳐져 있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꼽힌다.

회백질(gray matter) 뇌의 신경세포가 모여 있는 곳. 인지력, 기억력 등 사고기능을 담당하며 육안으로 봤을 때 회백색을 띤다.
백질(white matter) 회백질 사이를 연결하는 뇌 조직. 뇌 전체의 신경세포들을 서로 연결하는 신경섬유망이 깔려 있다.



40년 묵은 안전기준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운동장비에 대한 안전 표준 확립과 인증을 맡고 있는 미 국립운동용품표준실무위원회(NOCSAE)는 더미(dummy)라 불리는 모의인체를 활용해 인증 여부를 결정한다.

실험 과정은 이렇다. 발포재로 만든 더미 머리에 헬멧을 씌운 다음 원통형 실린더에 넣는다. 이 실린더의 상단에는 무거운 플라스틱 디스크가 금속 팔에 의해 고정돼 있다. 실험자가 1.5m 높이에서 디스크를 떨어뜨리면 헬멧과 충전하게 되고 더미 머리의 무게중심 부위에 내장된 가속도계가 선가속 충격을 측정하게 된다. 이를 NOCSAE에서는 수직낙하 시험이라 한다.

그런데 NOCSAE는 운동용품 제조사들이 자금을 지원해 설립된 기관이다. 그리고 이 기관의 미식축구 헬멧 안전기준은 창립 직후인 1973년에 마련된 이후 지금까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장장 40년이나 묵은 기준인 것이다.

이제 작년 8월 오스틴 콜리 선수의 뇌진탕 상황을 떠올려 보자. 그는 1차 태클로 고개가 돌아간 뒤 래리 푸트 선수의 2차 태클에 의해 나가 떨어졌다. 누가 봐도 그의 머리에 가해진 충격은 NOCSAE의 수직낙하 시험에서 측정하는 선가속 충격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바로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 하나가 도출된다. 수직낙하시험이 정말로 회전가속 충격과 연관이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얼마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수십억 달러를 호가하는 상품 매출·의료비·소송비용 등의 향방이 좌우된다.

선가속 충격과 회전가속 충격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수직낙하 시험으로도 회전가속 충격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헬멧 제조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결론이 이것이다. 반면 두 힘의 상관관계가 없거나 미약하다면 선가속 충격을 막는 패드를 아무리 많이 추가해봤자 뇌진탕 방호에는 큰 도움이 안 될 것이 자명하다. 때문에 헬멧 제조사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현재의 헬멧 설계를 전면 개정해야 한다.

이와 관련 지난 2003년 미국 뉴햄프셔주 소재 심벡스는 '두뇌충격 원격측정시스템(HITS)'이라는 기기를 개발했다. 스프링이 내장된 6개의 가속도계 패드를 헬멧에 장착하고 실제 선수에게 씌우면 경기 중 충격이 가해졌을 때 경기장 사이드라인 밖의 수신 장치로 충격의 위치 및 강도를 무선전송하게 된다. 코치들은 이 기록을 보면서 선수의 상태를 실시간 체크할 수 있으며 연구자들은 헬멧의 안전성 개선에 활용할 실전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충격 추적자
'두뇌충격 원격측정시스템(HITS, 사진)'을 활용하면 NFL 코치와 의무요원들은 선수의 머리에 가해진 충격량과 충격 부위를 사이드라인 밖에서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다수의 연구자들이 HITS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데 버지니아텍 부상생체의료센터의 스테판 두마 소장이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요구에 의해 미국 내 모든 대학의 미식축구 선수들이 HITS 헬멧을 착용한 채 경기에 나서고 있다.

"지금껏 총 200만건 이상의 충격 데이터를 분석했어요. 그 결과, 선가속 충격과 회전가속 충격 사이에 명백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이 같은 주장과 달리 다른 연구자들은 결론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보스턴의대 캔투 박사에 따르면 모든 충격 데이터를 놓고 볼 경우에는 두마 소장의 말이 맞지만 뇌진탕을 일으킬 확률이 높은 각(角) 충격 상황에서는 두 힘 사이의 연관성이 대폭 줄어든다고 설명한다.

"극단적 사례를 들어보죠. 상대 선수에게 헬멧의 안면 마스크 부위를 가격 당하는 순간, 다른 선수가 측면 태클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머리가 옆으로 꺾이면서 충격이 가해질 겁니다. 이때는 선가속 충격은 매우 적지만 회전가속 충격이 엄청납니다."

"제가 만난 신경학자들 중 누구도 어떤 힘이 뇌진탕을 일으키는지 명확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HITS 데이터를 옹호하는 연구자만큼 신뢰성을 의심하는 연구자들도 많다. 이들은 또 체중 100㎏가 넘는 선수들이 온몸으로 충격을 가하면 헬멧 자체가 변형되면서 데이터에 왜곡이 생길 수 있으며, 회전가속 충격을 계산하는 HITS의 알고리즘에 결함이 있다고도 주장한다. 각충격을 중점 연구하고 있는 캐나다 오타와대학의 생체역학자 블레인 호시자키 교수는 두마 소장의 연구결과에 대한 의견을 묻자 분노한 태도로 토로했다.

"뇌진탕을 일으키는 충격이 뭔지를 생각해야 해요. 선수가 경험하는 충격이 총 1,000회라고 한다면 머리의 무게중심에서 크게 벗어난 각충격은 50회 정도에 불과하죠. 그런데 저희 연구 데이터에 의하면 그 50회가 가장 위험해요."

HITS 시스템은 뇌진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됐지만 이 시스템으로 확보된 데이터들이 오히려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결과를 낳았다고 하겠다. 특히 이런 불명확한 과학은 모호한 안전기준을 탄생시켰고, 모호한 안전기준은 다시 자의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현재 헬멧업계에 많은 신생기업들이 난립하며 서로 자신의 제품이 더 안전하다고 난투극을 벌이고 있는 근간이 여기에 있다.



차세대 뇌진탕 방호 헬멧

설계 스웨덴 MIPS가 개발한 '다방향 충격 방호 시스템(MIPS)'이 뇌진탕을 유발하는 회전가속 충격을 감소시킨다. MIPS 헬멧은 고강도 폴리카보네이트 외피와 충격흡수 패드, 선수의 머리와 맞닿는 얇은 플라스틱 내피로 구성된다. 플라스틱 내피는 고무 고리로 패드에 연결돼 있다.

방호 메커니즘 인간의 머리에는 두개골과 뇌 사이에 미끄러운 뇌척수액이 들어있다. 덕분에 충격이 가해지면 두개골이 뇌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며 회전가속 충격을 저감한다. MIPS도 이를 모방했다. 탄력성있는 고무 고리로 인해 외피와 내피가 약간 어긋나게 회전하면서 상당량의 회전가속 충격이 뇌에 도달하기 전 사라진다.

효과 실험 결과, MIPS는 뇌의 회전을 40~50% 감소시켰다.



정의사회구현
NFL 선수였던 대릴 존스턴과 데이브 듀어슨[좌측]이 2007년 은퇴선수 장애급여 지급과 관련한 미 상원의회 청문회에 출석[위]했다. 4년 뒤 듀어슨은 자신의 뇌를 보스턴의대에 연구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총기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헬멧 군비 경쟁



오랫동안 모터스포츠용 안전장비를 제작해온 빌 심슨은 2010년 12월 오스틴 콜리 선수가 사고를 당한 경기를 직접 관전하고 있었다. 경기 직후 그는 친구였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팀의 공격 코치에게 콜리 선수가 어떤지를 물었다. 친구의 대답은 간단했다.

"NFL 선수에게 그런 사고는 그냥 게임의 일부일 뿐이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심슨은 미식축구용 헬멧의 안전성 향상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작업장에서 헬멧 개발에 들어갔다. 이후 2011년 콜리 선수를 비롯한 다수의 프로 NFL 선수들이 심슨이 개발한 시제품 헬멧을 착용하고 경기장에 나섰다. 단 한 사람의 개발자에 의해 헬멧의 개발과 생산, 프로선수들의 착용이 모두 이뤄진 것이다. 이는 헬멧 업계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 그런 시험 결과들이 뭘 의미하는 거죠?"
" 저희 MIPS 헬멧이 킹왕짱 좋다는 뜻입니다."


이후 소수의 기업들이 분할하고 있었던 헬멧 시장에 다수의 신생기업과 발명가들이 출사표를 던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설계의 제품이 쏟아져 나왔고, 기존 기업들도 설계를 개선한 신제품을 출시하며 맞섰다.

기득권층과 신진 세력의 싸움이 늘 그렇듯 기존 기업들의 신제품은 대개 충격흡수 패드의 밀도와 두께, 위치를 변경한 것이었던데 반해 신생기업들은 창의적 설계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제품으로 POC벤처스의 '가디언 캡(Guardian Cap)'을 꼽을 수 있다. 이 제품은 헬멧이 아니라 헬멧의 겉에 덧씌우는 패드형 보호 커버다. 2011년에 큰 주목을 받았던 또 다른 혁신 설계로 '불워크(Bulwark)' 헬멧도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거주하던 한 항공우주공학자가 독자 설계한 이 헬멧은 선수의 머리 모양에 맞춤화할 수 있는 모듈형 외피를 채택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인지 아직 시제품도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다.

아무튼 심슨이 시제품 테스트를 거쳐 2012년 10월 공식 출시한 'SGH 헬멧'은 즉각 호평을 받았다. 필자는 그를 찾아가 이 헬멧이 어떻게 뇌진탕으로부터 선수들을 지킬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자신이 만난 신경학자들 중 누구도 어떤 힘이 뇌진탕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했다고 답했다. 당황한 필자는 어떤 힘이 뇌진탕을 일으키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힘을 막아낸다는 건지 다시 물었다.

"아주 엉뚱하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만 하시네요."

그는 SGH 헬멧의 외피가 탄소섬유와 케블라 소재로 제작됐으며 내피는 스티로폼과 유사한 재질의 구슬로 이뤄진 발포재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현존하는 어떤 헬멧보다 NOSCAE의 수직낙하 시험에 강하다고 밝혔다. 회전가속 충격에 대한 능력을 물었더니 그는 껄껄 웃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헬멧은 세상에 없어요."

"그러면 이 헬멧이 선수들의 뇌진탕 위험을 줄인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아니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결코 하지 않을 겁니다."

NFL측은 미 의회가 선수들의 뇌진탕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래 헬멧 제작자들이 주장하는 바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스포츠 의학자이자 NFL의 안전장비 소위원회 의장인 케빈 구스키위츠에 의하면 한 주도 새로운 장비를 보지 않고 넘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제 책상 한 편에 신생기업들이 개발한 신기술들에 대한 두터운 파일이 놓여 있어요. NFL은 새로운 장비를 선정할 때 신속함을 중시하지 않아요. 부상 방지에 도움이 될 장비를 선별해야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검토할 뿐이죠. 추가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기술들이 3~4개 정도 있습니다."

기존의 헬멧 제조사 중에는 리델이 뇌진탕 방지 능력에 가장 확고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미 지난 2002년 '뇌진탕 저감 기술(CRT)'이 채용됐다는 '360' 헬멧을 내놓았다.

한때 리델의 홈페이지에 올려 있었던 홍보영상에는 캐나다의 바이오키네틱스연구소가 NFL의 자금으로 수행한 연구에 기반해 CRT가 개발됐다고 나와 있다. 연구팀이 NFL 경기를 보며 뇌진탕을 유발하는 충격 부위와 거리, 속도를 측정했는데 회전가속 충격이 뇌진탕의 주요 원인이며 선수들은 주로 얼굴의 측면을 타격 당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설명이다. 이에 맞춰 리델은 헬멧의 측면과 정면에 더 많은 충격흡수 패딩을 넣을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했다. 이것이 CRT의 요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 리델의 주장처럼 CRT나 360 헬멧이 어떻게 회전가속 충격을 저감시킨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리델의 수석개발자 새디어스 이데 박사에게 전화로 직접 물어봤다.

"많은 충격 사례에서 선가속과 회전가속이 함께 나타납니다. 선가속 충격을 감소시키면 회전가속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텍 두마 소장이 HITS로 알아냈다는 내용과 다를 바 없는 대답이었다. 혹여 보스턴의대 캔투 박사를 위시한 회의론자들과 달리 두마 소장이나 리델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더욱 심각한 의문이 남는다. 선가속 충격을 줄여서 뇌진탕 위험을 낮출 수 있고, 패드를 추가하는 것으로 선가속 충격을 줄일 수 있다면 왜 아직까지 미식축구 선수들의 뇌진탕 발생 빈도가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오타와대학의 호시자키 교수는 이렇게 단언했다.

"뇌진탕 발생 건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하나에요. 그들의 판단이 틀린 겁니다."







데드존
전직 NFL 선수의 뇌조직. 어두운 부분이 타우 단백질이 형성된 곳이다.

NFL 선수의 자살 그 이면의 진실

불치병
전직 권투선수들에게 나타나는 영구적 뇌세포 손상을 '펀치 드렁크(punch drunk)'라 표현한다. 정확한 용어는 만성외상성뇌병증(CTE)이다. CTE는 머리에 잦은 충격을 받는 운동선수라면 종목을 불문하고 발견된다. 아직 치료법은 물론 진단법조차 없다. 사후에 뇌를 적출해 검사해야만 CTE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발병 원인
원론적으로 머리에 반복해서 가해진 외상이 CTE의 핵심 원인이다. 강한 충격이 아니어도 약한 충격이 누적되면 발병할 수 있는 것. 이런 충격이 뇌의 신경 세포손상, 타우(tau) 단백질 생성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타우 단백질은 뇌 신호의 전달을 막아 기억력 상실, 충동제어 불능, 공격성, 우울증 등을 일으킨다.

발병 빈도
미국 보스턴대학 CTE연구센터에서 신체접촉이 허용되는 운동선수들의 뇌를 부검한 결과, 18명 중 17명에게서 CTE가 발견됐다. 또 다른 연구팀의 최근 발표에 의하면 NFL 선수들의 경우 은퇴 후에 알츠하이머병 같은 뇌 질환에 의해 사망할 확률이 일반인 보다 3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책
미식축구 헬멧의 안전기준은 두개골 골절 방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때문에 패드들은 대개 강한 충격의 흡수를 위해 딱딱하게 제작된다. 그러나 이는 뇌에 강한 힘을 전달하며 충격이 반복되면 CTE를 일으킨다. 강한 충격에는 딱딱해지고, 약한 충격에는 부드러워지는 적응형 패드가 다소나마 대안이 될 수 있다.


새로운 희망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할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희망의 끈을 놓기에는 아직 이르다. 현재 스웨덴의 한 신생기업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헬멧을 테스트하고 있다. 스웨덴 왕립공과대학(KTH)의 생체역학자 페터 할딘 박사가 설립한 MIPS가 그 주인공이다.

필자가 스톡홀름 교외에 위치한 이 회사의 연구실에서 할딘 박사를 만났을 때 그는 낙하시험 장비 앞에서 더미의 머리에 헬멧을 씌우고 있었다. NOCSAE의 수직낙하 장비와 달리 그의 장비는 수평 이동하는 공압식 디스크에 헬멧을 떨어뜨려 충돌시킨다.

"헬멧의 충돌 각도, 낙하 높이, 디스크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다른 시험장비보다 회전가속 충격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죠. 더미 머리 내에 내장된 9개의 가속도계가 충돌 시의 선가속력을 측정하며 컴퓨터가 이 데이터를 전달받아 회전가속력을 계산하는 방식입니다."

요즘 할딘 박사는 두 개의 스키 헬멧을 비교시험 중에 있다. 두 헬멧의 차이는 단 하나다. 한쪽에는 밝은 노란색 플라스틱 내피가 들어있고 다른 헬멧에는 그것이 없다. 이 내피는 고무 고리에 의해 헬멧의 외피 및 충격흡수 패드와 연결돼 있는데 할딘 박사는 이를 '다방향 충격 방호 시스템(MIPS)'이라 부른다. 상용화를 위해 기업을 설립한 그는 이 시스템의 이름을 따 회사 이름도 MIPS로 정했다.

MIPS는 인간의 머리를 모방한 것이다. 우리의 머리는 뇌척수액이 두개골과 뇌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는데 MIPS에서는 플라스틱 내피와 고무 고리가 뇌척수액이다. 충격이 가해졌을 때 고무 고리가 살짝 늘어나면서 외피와 내피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회전, 회전가속력이 뇌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반감시키는 원리다.

" 뇌진탕 발생 건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하나에요. 그들의 판단이 틀린 겁니다."

테스트는 MIPS가 채용되지 않은 일반 헬멧부터 시작됐다. 헬멧을 장비에 부착한 그는 고속카메라를 켠 뒤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공압식 디스크가 레일을 따라 초속 6.7m로 전진하면서 초속 3.6m로 떨어지는 헬멧과 강하게 충돌했다. 컴퓨터 화면을 보니 더미의 머리에 약 170G에 달하는 선가속력이 가해졌다. 컴퓨터가 계산한 회전가속력은 1만4,100㎭/s². 이 정도면 뇌진탕 이상의 부상을 입힐 수 있는 충격이다.

다음은 MIPS 헬멧의 차례. 앞서의 실험과 완벽히 동일한 조건에서 충돌이 이뤄졌다. 회전가속력은 6,400㎭/s²였다. 무려 55%나 줄어든 수치다. 만면에 웃음을 띤 할딘 박사는 오랜 기간 충격 시험을 하면서 확인된 효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필자는 이렇게 반문했다.



박치기 왕
현재 NFL 헬멧의 안전인증 설비는 경기장에서 실제 일어나는 충격을 100% 재현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런 시험 결과들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거죠?"

그는 컴퓨터 화면의 그래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헬멧이 킹왕짱 좋다는 뜻입니다."

그는 현명하게도 MIPS가 어떤 헬멧, 어떤 상황, 어떤 충격에서도 운동선수의 뇌진탕을 막아준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헬멧을 손에 들고 자신감 있게 설명했다.

"MIPS는 모든 방향의 회전가속력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감소폭이 탁월하죠. 이쪽 방향의 회전가속력은 35%, 또 이쪽 방향은 25%, 그리고 이쪽은 15% 감소돼요. 다행히 15% 정도 감소되는 방향에서의 충격은 NFL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답니다."

MIPS는 최근 등장한 개념은 아니다. 그 기원은 1997년 스톡홀름 소재 카롤린스카병원에 근무하던 신경외과의 한스 폰 홀스트 박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하키 등 스포츠 경기 중 뇌에 부상을 당한 환자들을 돌보는데 지쳤다. 그래서 왕립공대의 할딘 박사와 함께 10년간 외상성 뇌 손상을 연구했다. 두 사람은 연구초기 회전가속력에 주목했고, 머지않아 MIPS 방식의 충격저감시스템을 떠올렸다.

이들의 첫 작품은 승마용 헬멧이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좋은 기술이 꼭 성공적 상용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생산과 품질관리 문제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기업경영 경험이 많은 니클라스 스틴버그를 영입, 최고경영자(CEO)를 맡겼다.

영입된 스틴버그는 시장상황을 분석한 후 자동차용 에어백, 인텔의 프로세서가 그러했듯 MIPS도 완제품 시장을 공략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대신 기존 헬멧 제조사들에게 MIPS 기술의 라이선스를 줘서 그들의 안전성을 높이는 방식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이후 MIPS는 스노보드, 스키, 사이클, 모터바이크 등의 헬멧 제조사 20개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현재 스틴버그 CEO는 그동안 확보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미국이라는 대형시장에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일단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NHL) 시장을 공략한 뒤 NFL로 발을 넓힐 생각입니다."

㎭/s² 1제곱초당 라디안(radian). 회전을 측정하는 표준 단위.



돈을 쫓아라

그렇다면 앞으로 리델과 같은 기존 업체들도 MIPS 기술을 채용하거나 이와 유사한 기능의 헬멧을 개발하게 될까. 비교적 간단한 원리로 뇌진탕의 주요 원인인 회전가속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데다 이미 출시된 헬멧과 손쉽게 결합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작년 3월 은퇴 한 뒤 MIPS와 미국 헬멧 제조사들의 만남을 주선해온 전 NHL 수석사무국장 켄 야페는 현실이 만만치 않다고 강조한다.

"작년 한 해 동안 스틴버그 CEO와 할딘 박사를 데리고 여러 회사를 찾아다녀본 결과, 회의론에 직면했습니다. 저희를 끌어안고 고맙다고 말하리라고 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크게 관심조차 없더군요."

왜 그런 것일까. 야페는 현재의 안전기준 하에서는 헬멧 제조사들이 굳이 지금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 헬멧 연구자들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선수들의 안전을 최우선시 해야 할 인증기준이 헬멧 제조사들의 법적 방패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NOCSAE의 안전인증을 받으면 선수가 부상을 당해도 법적 책임에서 한결 자유로워진다. 반면 어떤 회사가 현 기준 이상의 안전 기술을 채용한다면 오히려 경쟁업체로부터 소송을 당할 위험이 커진다.

다른 회사들의 헬멧이 안전하지 않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탓이다. 버지니아텍 두마 소장은 NOCSAE가 스포츠 안전장비 제조사들이 돈을 대서 설립한 기관이라는 게 이러한 현실을 불러온 원흉이라 지적한다.

"만일 GM이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시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면 모든 제품에 최고등급을 주는 게 당연합니다. NFL에서 NOCSAE가 바로 그런 기관이에요. 다른 산업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죠. 한마디로 NOCSAE는 돈을 쫓는 겁니다."

스틴버그 CEO 또한 이 현실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 피력한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미식축구용 헬멧의 안전성 논란은 비단 프로선수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원과 학교에서 미식축구를 즐기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도 하다.

"헬멧의 안전성을 높일 대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입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물론 새로 개발된 안전기술이 이런 패러독스에 빠지는 일은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뛰어난 기술이 비정한 현실적 논리에 밀려 좌초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 업계가 감당해야하는 비용이, 그 기술이 없을 때 대중들이 지불해야하는 비용보다 큰지 작은지를 따지는 경제 논리 말이다. 게다가 이 논리에 신뢰성이라는 변수까지 끼어들면 변호사, 판사, 입법자들의 개입이 이뤄진다. 그러면 문제의 해결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탁상공론의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안전벨트를 자동차에 필수 장착하도록 규제하는 법률이 통과되기까지 무려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는 게 그 실례다.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최근 조금씩 상황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오타와대학 호시자키 교수가 NOCSAE의 자금을 지원받아 회전가속력 감소를 포함한 새로운 헬멧 안전표준을 만들고 있는 것.

"저는 헬멧 제조사들이 지금보다 안전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 믿고 싶어요. 단지 현재의 기준 하에서 자신들이 회전가속력을 극복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죠. 신뢰성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요. 새로운 기준이 마련되면 이 장애물들은 사라질 겁니다."

한편 작년 여름 유명 아이스하키 헬멧 제작사인 바우어가 회전가속 충격 완화에 직접적 효과가 있다는 제품을 출시한 바 있다. '리-액트(Re-akt)'로 명명된 이 헬멧은 MIPS와 메커니즘이 거의 동일하다. 서스펜드 테크(Suspend-Tech)라는 기술 명칭만 다를 뿐 MIPS처럼 착용자의 머리와 패딩 사이에 별도의 내피를 삽입하는 구조다.

MIPS와 바우어가 기술적으로 협력을 한 것인지, 바우어가 어떻게 이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양사 간의 지적재산권 문제는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리 중요치 않다. 우리에게는 바우어라는 기득권 세력이 회전가속력에 관심을 가졌으며 관련제품을 출시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 MIPS와 바우어의 행보는 분명 다른 기업들의 분발을 촉진할 자극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희망적 징후는 NFL 사무국이 MIPS와 같은 신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NFL의 안전장비 소위원회 케빈 구스키위츠 의장은 "MIPS 등이 주장하는 개념 주목하고 평가를 진행 중"이라며 "NFL은 이를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세월 연구자들과 헬멧 제조사, NFL 사무국 등의 이해당사자들이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에도 미국에서만 420만명의 사람들이 필드와 학교 운동장, 공원에서 미식축구를 즐기고 있다. NFL 선수이든, 중고교 및 대학 학생이든, 일반 동호인이든 상관없이 이제 이들 모두에게 더 안전한 헬멧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 모두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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