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냐고? 그렇다. 단지 이들은 조금 기이한 천재다. 극단의 천재성과 중증 장애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스터리한 증상을 우리는 '서번트 증후군'이라 부른다. 그런데 도대체 천재성과 장애라는 극단의 존재가 어떻게 한 사람 속에 공존하게 됐을까.
박소란 과학칼럼니스트 noisepark510@hanmail.net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레인 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했던 레이먼드라는 인물은 심각한 자폐증 환자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모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카드게임에서 한 번 본 패를 모조리 기억하거나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우는 등 숫자의 암기에 경이적인 재능을 보이는 것이다.
레이먼드처럼 중증 장애, 특히 자폐증과 같은 지적 장애를 지닌 사람이 특정 부분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것을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 이 증후군을 가진 사람을 '서번트'라 한다. 레이먼드의 실제 모델이었던 미국인 킴 픽이 바로 서번트다.
지난 2009년 58세를 일기로 사망한 그는 실제로 식사, 운전 등 모든 부분에서 도움을 필요로 했다. 반면 ○○○○년 ○○월 ○○일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오늘은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것인지를 단 몇 초 안에 귀신처럼 계산해냈다. 인간 두뇌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이랬던 그의 아이큐가 70에 불과했다.
서번트 신드롬 연구의 개척자인 미국 세인트 아그네스 병원의 정신과 전문의 대럴드 드레퍼드 박사를 포함, 많은 연구자들이 픽을 대상으로 연구를 수행했지만 어떻게 그가 그런 능력의 소유자가 된 건지는 끝내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그의 좌뇌 중 일부가 손상됐다는 것 외에는 어떤 힌트도 없는 상태다.
천재성과 장애의 불편한 동거
서번트 증후군의 정식 의학 용어는 '이디어트 서번트(idiot savant)'다. 우리 말로 풀어보면 '바보 천재'쯤 되는데 아인슈타인과 뉴턴 등 천재적 학자들이 겪은 것으로 유명한 '아스퍼거 증후군'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증상이다.
서번트 증후군은 지적장애 환자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게서만 나타난다. 한 통계에서는 자폐증 환자의 10% 정도가 서번트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는 몇몇 일반인이 지닌 사소한(?) 재능을 모두 포함한 수치다. 진짜 서번트는 전 세계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게 드레포드 박사를 비롯한 다수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그리고 통계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의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다만 전체 서번트의 50%가 자폐증 환자라는 점에서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개연성은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서번트들이 보여주는 탁월한 능력들은 대부분 제한된 범위 내에서 발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수학, 언어, 음악, 미술 등의 분야가 대표적이다. 이들 중 한 분야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이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형편없는 것.
서번트 개개인의 증상은 쉽사리 일반화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다양하다. 레인맨의 레이먼드처럼 계산기 없이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복잡한 산수 문제를 척척 해결하고 암산에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 있는 반면 수천~수만 권의 책을 한번 읽고는 어느 책 몇 페이지의 몇 번째 줄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를 빈틈없이 기억하는 암기 천재도 있다.
예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기도 한다. 걸음마를 떼지도 못한 세 살배기 어린 아이가 원근법을 표현할 만큼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거나 아무리 길고 복잡한 곡이라도 한번 들으면 악보를 완벽히 외워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주지하디시피 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심각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 복잡한 산수의 정답은 주저 없이 말하지만 정작 기본적인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악기 연주나 그림 실력은 뛰어나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샤워나 식사를 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한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 같은 상반된 증상을 동시에 갖게 된 걸까. 서번트를 연구한 호주국립대학 앨런 스나이더 박사는 정보를 차단하는 뇌의 한 부분이 고장 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일반인의 뇌는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일 때 과부하를 막기 위해 나름의 필터링을 한다.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거나 덜 중요하다고 판단된 내용을 제거한다. 하지만 서번트들은 이 기능에 이상이 생겨 뇌가 모든 정보를 100% 처리한다. 이 때문에 지적장애로 표현되는 무수한 혼란이 야기되는 반면 무궁무진한 정보를 활용해 특정 부분에서 천재성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필터링은 뇌의 어떤 부위에서 이뤄지는 것일까.
측두엽에 숨겨진 비밀의 열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의 뇌 과학자 브루스 밀러 교수는 서번트들의 뇌를 스캔해 살펴본 결과, 뇌의 특정 부분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했다. 그 부분은 측두엽(temporal lobe)이었다. 뇌의 양쪽 반구 바깥쪽, 즉 관자놀이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청각과 언어능력에 관련된 부위다.
일본의 과학칼럼니스트 쿠가 라나이의 저서 '과학, 미스터리를 읽다'에는 측두엽과 서번트 신드롬이 연관돼 있다는 밀러 교수의 주장이 이렇게 적시돼 있다.
"밀러 교수는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왼쪽 측두엽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부서져 문이 열려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일반인의 경우 그 부분에 자물쇠가 걸려있다." 정리하자면 앞서 언급한 뇌 속의 필터가 바로 측두엽이다. 스나이더 박사 역시 이 같은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측두엽의 필터링 기능을 인위적으로 무력화시키면 일반인도 서번트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판단해 실제 임상실험을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경두개자기자극치료술(TMS)로 측두엽을 무력화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TMS는 뇌의 국소적인 부분에 자기(磁氣) 자극을 가하는 기기로, 뇌의 심부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고 뇌를 흥분 혹은 억제시켜 인간의 행동과 정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우울증 환자의 치료에 주로 활용되는데 감정 조절에 중요한 뇌의 전전두엽을 활성화시켜 불안감, 강박감 등의 감정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방법으로 TMS는 자기 자극을 통해 뇌의 특정부분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도 있다. 스나이더 박사가 이 장치로 측두엽을 자극해 필터링 기능을 막을 수 있다는 가정을 세운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쿠가 라나이에 따르면 스나이더 박사와 달리 실질적인 실험을 감행한 이들도 있다. 호주 애들레이드대학 연구팀이 총 17명의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얼마간의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실험 후 5명에게서 달력 계산 등 몇몇 능력이 높아졌다는 것. 비록 서번트들의 능력치와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로써 측두엽은 서번트 증후군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주요 단서로 떠오르게 됐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서번트 증후군의 모든 증상이 측두엽 만으로 완벽히 설명되지는 못한다. 그러기에는 서번트들의 행동이 너무나 복잡다단하다.
제3의 가능성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번트 증후군을 '인체의 보상능력'에 따른 결과로 추정한다. 뇌의 한 부위가 손상돼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자 다른 부위에서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우수한 기능을 발휘했다는 얘기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보다 청각이나 후각이 훨씬 잘 발달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킴 픽의 경우 좌뇌의 일부가 손상된 대신 우뇌가 극단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이 주류학계의 판단인 것이다.
서번트의 여러 능력들이 다분히 직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판단은 일견 충분히 수긍이 간다. 반면 여전히 이러한 주장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도 상당하다. 여러 서번트들의 뇌를 스캔한 결과에서 정상 소견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뇌 손상을 지니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것이 반론의 근거다.
영국의 유명한 서번트인 대니얼 태멋도 이 반론에 동의한다. 자폐증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는 매우 드물게 타인과의 원활한 대화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그는 어릴 적 간질을 앓으면서 뇌 기능이 손상된 뒤 서번트가 됐다.
그의 서번트적인 능력은 수학과 언어에서 나타났다. 언어 습득이 빨라 10여개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지난 2003년에는 우리가 '3.14'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는 원주율을 5시간 동안 2만2,514자리까지 암기해냈다. 특히 그는 다수의 책을 쓰기도 했는데 저서 '뇌의 선물(Embracing The Wide Sky)'에서 서번트의 능력은 초능력이 아닌 지혜라고 강조했다.
"서번트들이 카메라로 촬영하듯 정보를 단순히 기억했다가 끄집어낸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뇌에 꽉 들어차 있는 정보들 가운데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찾아내 잘 조합해 내는 것일 뿐이다."
이는 서번트 증후군의 핵심이 뇌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수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완벽하게 '잘 조합해' 낼 수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여기까지는 태멋도 명확한 생각을 내놓지 못했다.
이외에도 서번트 신드롬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항간에서는 모든 정보를 눈으로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시각적 능력이 서번트 증후군의 원천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부 서번트들이 시각장애인이라는 부분을 상기한다면 이 역시 정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지금으로서는 서번트 증후군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나 가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양상이 워낙 다양한 만큼 그것을 해석하는 일 역시 만만치 않은 작업임에 틀림없다.
결국 서번트 증후군은 귀신, UFO, 초능력 등과는 조금은 다른 차원, 다시 말해 신비주의적이고 오컬트적인 요소는 없지만 아직 과학이 풀지 못했고 앞으로 풀어내야할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이한 천재들의 탄생을 명확히 설명해줄 또 다른 천재가 하루 빨리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아스퍼거 증후군 (asperger syndrome) 정상적인 지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타인과의 소통 등 사회활동에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뛰어난 천재성을 보이는 증상. 이른바 괴팍한 천재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신의 영역 (god spot) 살다보면 누군가는 실제로 신(神)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그저 환각에 불과한 걸까. 이에 대해 몇몇 학자들을 뇌의 측두엽에 주목해 '측두엽 간질'과 연계시켜 해석한다. 측두엽 간질은 성인에게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간질의 일종으로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측두엽, 특히 측두엽에서 튀어나와 있는 해마(hippocampus)의 경화로 인해 유발되는 경우가 많다. 이 질환의 주된 전조 증상으로는 갑작스런 공포감과 행복감, 또는 기시감 등을 느끼는 것이다. 이유 없이 이상한 냄새와 맛을 느끼기도 한다. 이후 발작이 일어나면 보통 30초에서 2분간 지속되며, 대개 주변 상황에 대한 인식능력이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에서는 신을 보거나 신의 음성을 듣는 체험(?) 역시 측두엽 간질의 전조증상으로 여긴다. 실제로 측두엽 간질환자 중 다수가 신비한 체험, 그중에서도 종교적 체험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쇼팽도 측두엽 간질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는 피아노 연주 중 갑자기 신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 자신을 방에서 내쫓았다는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이런 이유로 측두엽은 '신의 영역(god spot)'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경화 (硬化) 조직 따위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 후천적 천재들 서번트들 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에 손상을 입은 후 서번트가 되기도 한다. 지난 5월 전 세계 언론을 장식했던 한 수학 천재의 스토리가 그 실례다. 외신에 따르면 10년전 미국 워싱턴주에서 강도들과 몸싸움을 벌인 제이슨 패지트는 흉기로 머리를 맞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 갑자기 수학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다. 무한대의 원주율 값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일상 속 여러 현상을 프랙털(fractal)이라는 난해한 수학 이론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신경의학자들은 이런 그의 상태를 서번트 증후군으로 진단했다. 강도에게 당한 충격으로 수학적 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한 부위가 영향을 받아 고도의 재능을 발휘하게 됐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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