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과학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좀비의 모습은 보통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 엄청난 힘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존재'다. 하지만 이는 원래의 좀비가 지닌 의미와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다. 좀비는 부두교 주술사의 주술에 의해 영혼이 빠져나가고, 외부의 조종이 있어야 움직이는 인형과도 같은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재 좀비가 가진 이미지는 마치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며 공포 정치를 펼쳤던 루마니아의 영주 블라드 쩨뻬쉬의 스토리가 상업적 목적으로 왜곡돼 미녀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 백작으로 재탄생한 것과도 비슷한 길을 거쳐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좀비는 과학적 관점에서 개연성이 크게 떨어진다.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 움직인다는 것 자체부터 말이다. 하지만 옛말에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라고 했다. 세 사람만 말을 맞추면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거짓말도 진실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좀비가 실존할 수 있는 일말의 개연성을 찾아내 매달리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인류 문명에 대한 위협
대중문화에서 그려진 좀비는 행동이나 파급효과 면에서도 원래의 좀비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하루아침에 좀비가 엄청난 숫자로 불어나 사회에 대혼란을 일으킨다거나 아예 문명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이른바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을 빈번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부류의 영화는 1968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효시며 최근에만도 28일후, 레지던트이블, 새벽의 저주, 나는 전설이다 등 많은 영화들이 그 시놉시스를 답습하고 있다. 대개 대규모 혹은 전 세계적인 좀비의 출현으로 영화가 시작되는데 좀비들은 인류 문명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하고, 희생자를 좀비로 만들며 세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린다. 이로 인해 공황상태에 빠진 인간 사회가 붕괴 직전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을 지탱하는 두 가지 기둥은 '전염성'과 '파괴력'이다. 초기 대중문화 속 좀비는 전염성이 없었지만 인류가 전염병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면서 좀비 문화에 유입된 결과물이다.
상당수의 작품에서 좀비의 출현 이유를 주술 등 비과학적인 방식이 아닌 바이러스와 같은 과학적으로 실체가 규명된 매개체를 동원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파괴력도 마찬가지다. 좀비는 문명을 붕괴시킬 만큼 강력한 존재로 묘사되지만 대중문화 전문가들은 이러한 설정이 냉전시기 강대국의 핵개발 경쟁으로 인해 인류가 순식간에 멸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좀비 아포칼립스 시나리오의 이면에는 인류 문명의 취약성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사건이 말해주듯 지진, 전염병, 해일, 홍수, 기근 등 대형 자연재해가 발발하거나 폭동 등에 의해 국지적 무정부 사태가 야기된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그렇기에 일부 학자들은 좀비를 단순한 오락거리로 치부하지 않고 '좀비 아포칼립스처럼 인류 문명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재난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라는 실존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다. 이번 헤일로 코퍼레이션의 좀비 대테러 훈련 역시 그러한 연구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좀비에 대한 과학적 고찰
지난 2009년 캐나다 오타와대학 로버트 스미스 박사는 유명 좀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설정에 전염병이 전파되는 양상을 패턴화한 수학 모델을 적용, 역학적 관점의 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 결과는 명확했다. 신속히 대응하지 않으면 문명의 종말을 불러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피해자들을 격리 치료하는 현재의 수동적 전략보다는 좀비를 적극적으로 찾아 초기에 제거하는 능동적 전략이 더 효과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위험성에 비추어 보건대 격리치료는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큰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스미스 박사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치료법을 발견하더라도 좀비의 전파 속도를 늦추기 어렵기 때문에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 모든 인간이 좀비화가 되거나 사망할 수도 있다고 봤다. 덧붙여 이러한 모델링은 특정 정치적 관점이나 전 세계적인 감염성 바이러스의 확산 모델에 적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의 애덤 초도로우 박사가 올해 법학적 관점에서 발표한 연구는 좀더 흥미롭다. 연구주제는 '좀비에 대한 미국 연방세 및 주세(州稅)의 부과 여부'였다.
그는 엄밀히 말해 좀비가 사망자가 아니라며 "미국 대부분의 주법(州法)에서 보면 자유의지를 갖춘 좀비는 뇌졸중 환자나 알츠하이머병 환자, 식물인간과 같은 생존자로 간주된다"고 밝혔다. 따라서 좀비의 출현에 대비해 좀비를 위한 특별 조세제도를 시행할 것을 관계당국에 제안했다.
그런가 하면 영국 글래스고대학에서는 좀비 이론연구소(ZITS)라는 가상의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연구소의 소장은 실제 인물은 아니며 대학 측이 만든 오스틴 박사라는 이름의 캐릭터다. 업무 내용은 좀비 아포칼립스가 실제로 발생했을 때의 상황을 과학을 통해 예견하는 것으로써 연구의 대부분은 대중문화 속 좀비 아포칼립스의 내용의 반박하는 내용에 집중돼 있다.
만사 불여 튼튼
미국 CDC가 밝힌 좀비 아포칼립스 대처방법은 의외로 다른 재해에 대비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미국 CDC의 행동 개시
좀비에 대한 학문적·실제적 고찰은 우리나라의 질병관리본부에 해당하는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도 있었다. 작년 5월 CDC가 자신의 블로그에 'Preparedness 101: Zombie Apocalypse'라는 글을 올린 것. 약간의 의역을 섞어 해석하자면 '좀비 아포칼립스 완벽 대비법' 정도가 된다.
원래 어느 나라이든 정부기관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래서 공식 웹사이트에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올려놓지 않는다. 이를 감안한다면 CDC의 행동은 상당한 파격이었다. 일단 이 글의 서두에는 좀비의 기원이 설명돼 있다. 그러나 운동 실조성 신경퇴행, 포만 결핍 증후군, 솔라눔 바이러스 등 영화나 소설의 시나리오 자료를 그냥 베껴 쓴 것인 만큼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적혀 있다. CDC는 가장 먼저 좀비 발생에 대비해 비상 물자를 챙겨 놓으라고 조언했다. 미리 확보해야할 물자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2주일분의 식수(1인당 식수 소모량 하루 4ℓ), 2주일분의 방부 처리된 식량, 의약품, 여러 공구와 배터리 등의 소모품, 개인 위생용품, 의류 및 침구, 운전면허증·여권 같은 중요한 증명서 등이다.
비상 물자를 비축했다면 가족들과 비상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좀비가 출현했을 때 연락을 취해야 할 곳과 대피장소, 집결장소 등을 사전에 정하라는 것이다. 또한 유사시 가족들에게 자신이 안전을 알릴 연락처, 피난 계획 등도 논의할 것을 권했다.
CDC는 여기까지를 개인이 할 수 있는 대응책이라 밝혔으며 나머지는 CDC가 해결하겠다고 했다. 좀비 발생 현장에 조사반과 응급대응팀을 출동시켜 조사·방역 활동을 수행하는 한편 좀비 발생의 원인과 전파 경로, 전염 가능성을 파악하고 치료책을 찾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후에도 CDC의 블로그에는 올 10월 현재 10여건의 좀비 관련 포스팅이 올라와 있으며 Zombie Nation(좀비 국가)과 Zombie(좀비)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최초 포스팅된 글의 원문을 잘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든 준비는 허리케인이나 지진, 홍수 등 다른 종류의 재해에도 충분히 유효하다.'는 메시지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왜 CDC는 이 메시지를 강조했을까. 이는 앞서 로버트 스미스 박사가 내린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좀비영화와 같은 아포칼립스 상황이 현실화될 개연성은 0에 수렴할 정도로 낮지만 자연적·인공적 재해로 인해 그와 유사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사실상 아무런 대비 없이 그런 상황을 맞는다면 좀비 아포칼립스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 자명하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이렇듯 '문명이 사라진 후의'상황에 대한 일반인들의 경각심을 제고하고, 평소에 비상상황을 충분히 대비토록 동기를 부여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더 나아가 극한의 재난 현장을 수습해야 하는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 응급구조대원들에게는 평상시 충분한 심적, 물적 준비를 갖추게 할 가장 흥미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 보수적인 집단에 속하는 학계와 정부까지 좀비 유행에 편승한 배경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연구대상
재해 상황, 무정부 상황 속의 인간이 좀비보다도 더욱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보면 학계와 정부, 기업에서 비상계획 수립을 위해 좀비를 연구해야 할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비현실로 대비하는 현실적 재난
헤일로 코퍼레이션의 '2012 카운터 테러리즘 서밋' 훈련은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된다. 총 1,000여명의 경찰, 군인, 의료진, 공무원 등이 참여한 채로 말이다. 참가자들은 좀비로 분장하고, 좀비처럼 행동하는 가상의 적에 대응해야 한다.
물론 헤일로 코퍼레이션 역시 좀비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는 기업이념에 충실하기 위해 좀비라는 소재를 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 10월부터 이미 직원들의 사내교육프로그램에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CDC의 블로그 글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습득한 기술들은 다른 재난 상황에서 우리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내는 유용한 동력이 될 것이다.
한편 미국 인디애나주에서는 헤일로 코퍼레이션과 동일한 목적으로 민간인 대상의 훈련프로그램도 운용되고 있다. 좀비로 분장한 대항군을 피해 5㎞의 거리에 설치된 15가지 이상의 장애물을 구보로 돌파해야 하는 '얼티밋 좀비 워리어'가 그것이다.
고대 신화는 신의 이야기인 것과 동시에 그것을 창작한 인간들의 오욕칠정이 녹아있는 현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허구인 신화 속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1세기의 신화라 할 수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도 다를 바 없다. 우리 스스로 만든 신화를 통해 우리는 과학문명이라는 편안한 쉼터가 실은 카드로 만든 집에 불과함을 깨달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Preparedness 101: Zombie Apocalypse '(http://blogs.cdc.gov/publichealthmatters/2011/05/preparedness-101-zombie-apocalypse/)'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좀비 탄생의 5가지 과학적 설정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다음 원인들에 의해 인간의 좀비화가 충분히 가능하다. 1] 뇌 기생충 자연에는 숙주를 좀비와 유사한 상태로 몰고 가는 기생충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 좋은 예가 '톡소플라스마 곤디(T. gondii)'다. 이 기생충은 쥐를 감염시키지만 증식은 고양이의 장내에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숙주가 된 쥐의 두뇌를 장악, 고양이만 보면 달려들게 하여 잡아먹히게 하는 형태로 세력을 늘린다. 그리고 쥐와 인간은 유전학적 및 생물학적 관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돌연변이 등에 의해 T. 곤디처럼 인간의 뇌를 장악할 기생충이 생긴다면 좀비의 탄생도 불가능하지 않다. 2] 신경 독 부두교 주술사들이 좀비를 만들고자 할 때 신경 독을 사용했다. 복어에서 추출한 테트로도톡신으로 상대방을 최면상태에 빠뜨려 기억을 지웠다고 알려지는데 이러한 상황에 빠진 사람도 먹고 자거나 팔다리를 움직이는 간단한 동작이 가능했다고 한다. 3] 분노 바이러스 영화 '28주후'에서 상정한 좀비 탄생의 근거지만 현실에 광우병이라는 유사 사례가 있다. 광우병의 프리온은 소의 뇌와 척수를 공격해 비틀거리게 만들고 마구잡이로 상대를 공격하게 만든다. 이런 프리온이 소 대신 인간을 공격하고, 막강한 전염력을 발휘한다면 28일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4] 신경 재생 줄기세포 기술을 이용, 대뇌피질을 제외한 뇌사자의 뇌신경을 재생시킬 경우 기본적인 운동능력과 본능을 가진 좀비를 만들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기술이 확보되더라도 실제로 시험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5] 나노로봇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처음부터 악의적 목적으로 개발된 나노로봇이 시체의 뇌 속에 침입, 뇌신경을 재생하는 시나리오다. 이렇게 좀비화 된 시체는 부패해서 근육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계속 움직일 수 있다. 만일 나노로봇이 자기복제가 가능하고, 생존본능을 가지게 된다면 망자에 더해 산 사람까지 공격해 좀비 세상이 될 개연성도 배재할 수 없다. 좀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좀비 영화에서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인간이 좀비와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6가지 과학적 이유 1] 자연의 포식자 인간은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싸우면 초식동물보다 조금 낳은 수준에 불과하다. 지능도 없고 도구도 사용할 줄 모르는 좀비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문명이 무너져 육식동물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면 좀비는 이들의 한 끼 식사꺼리에 불과하다. 2] 자연의 열기 한낮의 열기는 좀비의 부패를 촉진시킨다. 부패로 인해 발생한 가스가 내장에 들어차게 되면 결국 폭발할 수밖에 없다. 한여름 삼복더위 기간 동안만 잘 숨어 있어도 웬만한 좀비들은 사라지고 없을 개연성이 높다. 3] 자연의 추위 좀비도 인체인 이상 몸의 대부분이 수분이다. 하지만 체온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겨울에는 체내 수분이 꽁꽁 얼어붙어 꼼짝 못할 것이 자명하다. 이때 쇠몽둥이 하나만 들고 있어도 하루에 수백 수천에 달하는 좀비를 처치할 수 있다. 4] 전염의 비효율성 많은 영화에서는 좀비 바이러스는 좀비와의 직접적 접촉에 의해 전염된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의 전염은 병원체의 전파에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 직접 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에이즈, 광견병 등이 사람과 강아지를 몰살시키지 못한 것을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5] 부상 자가 치유 능력이 없는 좀비는 활동 중 입은 부상을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한다. 게다가 좀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해 정상인보다 심한 부상을 자주 입을 수 있다. 이렇게 상처가 난 부위는 부패가 더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사지가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좀비들이 넘쳐날 것이다. 6] 자연의 장애물 자연적이건 인공적이건 좀비의 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많다. 본능에만 의지해 목적 없이 떠도는 좀비들에게 낭떠러지, 계곡, 바다, 강 등은 그 어떤 치료제보다 빠르게 좀비를 제거해줄 수 있다. 프리온 (prion) 바이러스처럼 전염력을 가진 단백질 입자. 단백질(protein)과 비리온(virion, 바이러스 입자)의 합성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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