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0일 큰 틀의 합의 이후 교착 상태에 빠졌던 한미 무역협상이 이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전후 타결을 목표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한국의 고위급 무역 실무진들도 미국을 잇따라 찾으면서 협상 조건 막판 조율에 온힘을 쏟는 분위기다. 외교가에서는 한미 양국이 마지막까지 대미 투자 패키지 구체화, 국내 외환시장 안정화 방안 등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최대 쟁점 가운데 하나인 3500억 달러(약 500조 원) 대미 투자금에 대한 무제한 통화 스와프(화폐 맞교환) 방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비협조로 어려워졌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 정부는 이를 우회하기 위해 미국 재무부 계좌 개설, 분할 투자, 미국 국채 담보 등 각종 묘수를 쥐어짜내고 있지만 이들에는 통화 스와프 만한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분석이 많다. 특히 통화스와프 체결을 두고 정부 고위 관계자들조차 엇갈린 발언을 내면서 최종 관세 협상안을 예측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진단이다. 또 한국 정부 인사들이 부단히 실무급 접촉은 하고 있지만, 정작 달러 현금 선불을 요구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도 불안 요소다.
베선트 “열흘 내 한미 무역합의…마무리 단계”
스콧 베선트 재무부 장관은 지난 15일(현지 시간) 워싱턴DC 재무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의 대미 투자 약속과 관련한 이견이 해소될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앞으로 열흘 안에 무역협상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베선트 장관은 “우리는 현재 대화하고 있고 향후 10일 안으로 무엇인가를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한미 양국이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구성 방안을 두고 줄다리기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출구가 보인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베선트 장관은 이날 CNBC 방송에서도 “한국과 (무역협상을) 마무리하려는 참”이라며 “악마는 디테일에 있지만 이를 해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미 무역협상과 관련해서는 전문가들도 APEC 정상회의 때 트럼프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협상에 어느 정도 진척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같은 날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경제연구소(KEI) 세미나에서 커트 통 아시아그룹 파트너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임박하면서 양측이 무역협상에 집중하고 있다”며 “일정 부분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미 무역합의는 미일과 상당히 비슷할 것”이라며 “그 외의 어떤 합의안도 한국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기에 합리적인 수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미 경제외교를 담당하는 안세령 주미대사관 경제공사도 “안보·투자·무역·기술 협력 분야에서도 한미 간에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며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이달 말 만날 때 양측은 많은 내용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앞서 한미 양국은 7월 30일 큰 틀의 관세 협상을 타결하고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등을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두 나라는 그러다 8월 25일 한미정상회담 이후 대미 투자 이행 방안을 놓고 이견을 보이면서 최종 협정을 체결하지 못했다. 애초 한국은 직접 현금을 내놓는 지분 투자는 5% 정도로 설정하고 나머지는 직접 현금 이동이 없는 보증, 대출로 3500억 달러를 채우려고 구상했다. 하지만 미국은 미일 합의와 같은 사실상의 ‘투자 백지수표’를 한국에 요구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무제한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 합리적 수준의 직접 투자 비중, 투자처 선정 관여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통화 스와프는 “연준 몫” 선 그어…트럼프는 또 “3500억 달러는 선불”
트럼프 행정부는 다만 협상 막바지 시점까지 공식 석상에서 통화 스와프, 대미 투자금 집행 방식에 대해 미국 측 입장만 강조하며 압박을 넣는 자세를 취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관세 성과를 열거하면서 “한국은 3500억 달러를 선불(upfront)로, 일본은 6500억 달러에 합의했고 두 나라 모두 서명했다”고 또 다시 주장했다. 이 발언은 상호관세의 불법 여부에 대한 연방대법원 재판을 앞두고 관세가 미국의 경제·안보에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나왔다. 이를 두고는 한미 협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데다 일본의 대미 투자금 규모는 5500억 달러라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을 착오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됐다.
베선트 장관 역시 통화 스와프 문제를 연준의 책임으로 떠넘기며 발을 빼는 태도를 보였다. 베선트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재무부는 통화 스와프를 제공하지는 않으며 그건 연준 소관”이라면서 “내가 만약 내가 연준 의장이라면 한국은 싱가포르처럼 이미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연준과 300억 달러 한도를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던 적이 있다.
연준 승인을 통한 통화 스와프에는 사실상 선을 그은 셈이다. 애초 한국은 전체 대미 투자액 가운데 5%만 지분 투자 형태로 투입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직접 현금 이동이 없는 보증(credit guarantees) 형태로 지불할 계획이었다. 미국의 요구에 맞추다 보면 한국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20% 정도, 내년도 예산안(728조 원)의 67% 정도를 3년 동안 매년 달러 현금으로 넘겨줘야 한다. 초대형 달러 수요가 발생하면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현재 한국의 외화보유액은 4163억 달러 수준이고,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는 규모는 연간 200억~300억 달러 정도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은 8월 24일 UN총회에 참석해 베선트 장관을 만나고 “관세 협상은 양국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며 외환시장 안전판을 만들어 달라는 입장을 직접 전하기도 했다.
베선트 장관은 나아가 미국 대법원이 상호관세가 무효라고 최종 판결하더라도 각국과 체결한 무역 합의는 유효할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한국 등이 대법원 판단을 빌미로 무역 협상을 취소할 수 없게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베선트 장관은 “대법원이 상호관세를 무효화해도 행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관세 부과 수단이 많다”며 “각국이 무역 합의를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예 다음 달 5일 대법원의 상호관세 관련 첫 구두변론을 직접 방청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계획이 현실화될 경우 이는 현직 대통령이 대법원 심리를 방청하는 사상 최초 사례가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취재진에게 “우리가 그 사건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앞으로 여러 해에 걸쳐 약화되고 곤경에 시달리고 재정이 난장판이 될 것”이라며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대법원에 가서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정책실장 “美 많이 양보했으면…외환 영향 이해한 듯”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 무역협상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등도 15일과 16일 연달아 미국을 찾았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16일 워싱턴DC 인근 댈러스 국제공항을 통해 김 장관과 함께 미국에 입국하면서 취재진과 만나 한미 “지금까지와 비교해볼 때 양국이 가장 진지하고 건설적 분위기에서 협상하고 있는 시기”라며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협상이 잘 마무리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베선트 장관의 “열흘 내 예상” 발언과 관련해서는 “미국이 많은 양보를 할 것 같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김 실장은 “우리도 APEC 계기 한미 정상회담이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를 했고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며 “우리에게 나쁘지 않은 신호이고 그만큼 미국이 좀더 유연하게 우리 입장을 반영해줬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김 실장은 다만 이날 러셀 보트 백악관 예산관리국(OMB) 국장을 만나는 일정이 이 양국 협상의 문구를 조정하는 작업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관측에 대해서는 “그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김 실장은 “협상은 김 장관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하는 것”이라며 “조선업 등 두루두루 만나서 우리 쪽 입장을 설명하는 맥락이지 백악관 예산관리국이 협상을 직접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통화 스와프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리가 문제를 제기했고 미국이 이해했다 정도 외에 개별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며 “어떤 것은 그냥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왔던 것, 어떤 것은 한때 제안됐지만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얘기 등이 보도도 많이 나오고 있다”며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이고 단계별로 어떤 주제가 떠오르다 다른 주제로 옮겨가기도 하기 때문에 개별 주제데 대한 논의는 말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또 시간에 쫓겨서 협상 원칙에 벗어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이 현재도 유효한지를 묻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했다.
김 실장과 김 장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후 이날 낮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보트 국장을 50여 분간 만났다. 이들은 보트 국장과 또 다시 한미 조선업 협력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상의했다. 김 장관은 면담 후 취재진에게 “마스가에 대해 여러가지 건설적 얘기를 나누고 있다”면서도 최근 중국이 마스가의 대표적 업체인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5곳을 제재하기로 발표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 실장은 백악관 예산관리국 방문 직전 취재진에게 “백악관 예산관리국이 조선업 프로젝트에 굉장히 중요한 부처”라며 “우리나라와 미국의 조선업 협력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서로 인식을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김 장관은 이후 러트닉 장관과 만나 실제 무역협정 최종 타결 문제를 논의한다.
통화 스와프에 대해선 구윤철·위성락 제각각 발언…기대와 우려 혼재
현재 한미 간에는 무역 협상과 관련해 여러 이견이 있지만, 무엇보다 국민적 관심을 받는 부분은 통화 스와프다. 이미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트라우마 탓에 이를 전제하지 않은 협상에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연준의 승인을 받는 ‘실제’ 통화 스와프를 미국 행정부에서 내내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같은 태도가 트럼프 행정부와 연준 간 갈등에서 비롯된 것인지, 재정 적자 상황을 반영한 판단에서 나온 것인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통화 스와프와 관련해서는 한국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도 딴소리가 나왔다. 구 부총리는 15일 미국 워싱턴DC 인근 댈러스 국제공항에 도착해 ‘대규모 달러 조달에 따른 외환시장 안전장치 요구를 미국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미국 측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다”고 답했다. 반대로 위성락 대통령실 안보실장은 16일 브리핑에서는 “통화 스와프 문제에 현재 진전이 없고 큰 의미를 두거나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협상팀과 실시간으로 교감하지 않은 상태”라면서도 “미국 재무부와 우리 사이 통화 스와프는 유제한이든 무제한이든 진전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관세 후속 협상에 3500억 달러를 분할 투자하는 방안을 내밀 가능성이 크게 보고 있다.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미국의 요구대로 3500억 달러를 3년 내 집행할 경우 연평균 1167억 달러(약 165조 원)의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 외환보유액 감소 없이 한국 정부와 민간이 연간 최대 확보할 수 있는 외화가 200억 달러(약 28조 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많은 액수다.
원화 계좌를 만들어 대미 투자액을 집행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우리가 투자액을 원화로 지불하면 미국 정부가 현지에서 달러를 조달해 투자하는 방법이다. 이 방식을 따르면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조달하지 않고 미국 현지 한국 기업 등이 보유한 달러와 바꿀 수 있다.
한국이 연준이 미국 재무부와 통화 스와프를 체결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미국 재무부는 일종의 부처 ‘비자금’인 외환안정화기금(ESF)으로 아르헨티나 중앙은행과 2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다. ESF의 총한도는 2000억~2100억 달러 정도인 데다 보증 주체도 여러 곳이라 한국이 체결할 수 있는 스와프 규모는 대미 투자금 3500억 달러에 한참 못미친다.
통화 스와프뿐 아니라 대미 투자금의 현금성 비율도 협상 관건이다. 이 부분도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선불’ 발언을 수 차례 한 만큼 쉽게 바꾸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구 부총리도 16일 워싱턴DC의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특파원단과 만나 트럼프 대통령의 선불 요구에 대해 “한국 정부의 우려 사항을 전날 베선트 장관에게 전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설득될지는 불확실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APEC 정상회의 때 트럼프 대통령을 마주해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어려운 협상판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시장·기업·정책·정치·외교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ykh22@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