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커리어디시젼스 강연이 있었다. 그 강연에서 우리집은 일년에 제사가 거의 20번 정도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이 제사 음식과 일년에 한번 있는 시제(時祭, 문중 제례) 음식을 다르게 준비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더니 ‘뭐가 다르고 왜 다르냐?’라고 질문이 많이 들어 왔다. 기본적으로 제사와 시제의 차이를 보면 제사는 돌아가신 분 1인을 모시고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고 시제는 종친들이 묘소나 릉을 찾아가 시조를 기리고 후손들의 안녕과 평강을 비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서울에서부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을 행차하여 의례를 지내는 것이 시제의 모범이고 제례의 표본이다.
순우리말인 한가위를 부르는 추석은 중국의 중추절과 비슷하지만 중국과는 다르게 독립적으로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명절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잘 짓게 해준 하늘과 땅에 감사하고 동시에 모든 고을사람의 평강을 기원하며 음식을 나누는 우리 고유의 문화이다. 물론 한해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풍성한 추수를 할 수 해주신 신에 대한 감사 위에 조상님에 대한 감사와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 추가되어버렸다. 아마도 종친들이 따로 쉽게 다 모이지 못하기 때문에 시제의 기회가 줄어들어 추석에 조상들께 제사 지내는 시제의 기능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사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시제나 의례는 성리학이 들어온 조선시대 이후에 들어온 것이다. 한가위나 정월 대보름은 제사와 같이 고려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우리 고유의 전통과 문화이다. 시제는 기본은 조선시대 이후 궁궐에서 진행된 졔례일 것이고 이를 유생들에 의하여 서원에 파급되어 시제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시제와 제사는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음식도 다르다. 즉 우리 어머니가 어렸을 때 보여준 제사음식과 시제음식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제사음식은 돌아가신 분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그 지방에서 가장 맛있는 것으로 지냈다. 시제나 제례 음식은 조선시대 이후 남성 중심의 성리학자 양반들이 주도하다 보니 맛보다는 격식을 중요하게 따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여성들이 만든 우리 음식은 차례상에서 멀어지고 남성들이 책으로 접한 중국 음식이 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밑바닥에는 아마도 아낙들이 만드는 우리 음식은 천하고 중국 음식은 귀하다는 사대사상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고춧가루나 양념이 없는 기름기 있는 음식이 차례상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 성균관 학자들이 추석에 부치는 전이 우리 음식이 아니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궁중이나 양반 종가에서 제례 음식이 필요했으니 홍만선(洪萬選)과 같은 학자들이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이나 거가필용(居家必用) 같은 책을 번역하여 산림경제(山林經濟)를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시제음식이 색깔과 맛이 밋밋한 것이다. 중국음식은 기름으로 요리하여야 하는 데 우리나라는 기름도 많지 않고 기름으로 맛을 내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보통 제례음식이 맛이 없다.
조선시대 이후 의례나 제례음식은 우리 음식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요즘 흔히 말하는 궁중음식과 종가음식은 우리 음식에 뿌리를 둔 음식이 아니다. 우리 음식의 종류를 궁중음식, 종가음식, 서민음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잘못 되었다. 프랑스와 같이 왕이 즐겨 먹는 음식이 궁중음식이어야 하는 데 조선 시대는 제례나 의례를 위해 궁중에서 만드는 음식이 궁중음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즈음은 제사도 한 분을 위해 돌아가신 그날그날 모시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기일을 묶어서 단체로 한 번에 하는 집이 많아졌다. 또한 추석과 시제의 개념이 불분명하여 시제를 지내지 않고 추석 때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집이 많아 한가위의 본래 개념과도 벗어나 버렸다. 이와 같은 문화의 변화와 함께 요즘은 제사음식, 시제음식, 추석음식의 개념도 섞여버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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