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고율 관세를 앞세운 전방위 무역 압박을 이어가자 참다 못한 각국이 미국 중심의 국제 무역 질서에서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캐나다, 일본, 인도, 브라질,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국가들이 반미(反美) 연대를 모색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미국에 대한 공동 보복 조치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14일(현지 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EU가 일본·캐나다 등 주요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으로 피해를 본 국가들과의 공조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미국이 자동차·농산물 등에 대한 관세를 고수하면서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EU가 다자 협력에 눈을 돌린 것으로 풀이된다.
EU는 최근 들어 다양한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달 캐나다와 안보·방위 파트너십을 맺었으며 이달 23일에는 일본과 정상회담을 갖고 위성망 공동 구축 협약을 체결한다. 13일에는 인도네시아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정치적 합의에도 도달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격동의 시대일수록 파트너들은 더욱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며 EU는 믿을 수 있는 동맹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통상 네트워크 확장에도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베트남·싱가포르 등이 가입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으며 인도와는 연내 FTA 타결을 목표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인도 상공부는 “이번 협정은 유럽과의 경제 및 안보 협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우방으로 손꼽히던 캐나다도 독자 노선을 모색하고 나섰다. 캐나다는 연내 아세안과의 FTA 협상을 마무리하겠다고 선언했고 유럽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50%의 폭탄 관세를 때려 맞은 브라질은 인도와의 교역을 현재의 120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로 확대하기로 합의했고 멕시코와도 교역 규모를 대폭 늘리기로 했다.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 부소장은 “미국의 요구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국가들이 상호 협력에 나서며 대미 의존도를 줄이려는 흐름이 거세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NYT)도 “이제 관심은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얼마나 강하게 뭉쳐 실제로 미국에 대응할 수 있을지에 쏠려 있다”고 전했다.
다만 현재로서는 공식적인 ‘반미 연대’가 출범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아직까지는 EU, 브릭스(BRICS), 아세안 등 다자 체제 차원에서 트럼프 관세에 대한 공동 대응이 나오지 않은 탓이다. 알렉산더 하인드 멜버른대 교수는 “동남아 국가들이 하나의 전선으로 결집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면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 질서를 계속 뒤흔든다면 판도는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주목할 대목은 이번 흐름이 단순히 대미 견제를 넘어 중국에 대한 거리 두기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NYT는 “EU 내부에서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배제한 새로운 무역 질서를 구상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EU는 최근 중국의 희토류 자석 수출 통제, 전기차 관세 갈등, 대러시아 군사 지원 문제 등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의식한 듯 중국은 브릭스 및 글로벌 사우스(비유럽권 신흥국·개발도상국) 국가들과의 협력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관영 글로벌타임스에 따르면 중국은 자국이 개발한 심해 해양 장비를 브라질에 대규모 수출하며 그동안 서방이 주도해온 남미 에너지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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