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000270)가 말레이시아 판매법인을 설립해 7억 명에 달하는 아세안(ASEAN) 시장을 본격 공략한다. 일본 자동차가 강세를 보이는 동남아 시장을 공략해 글로벌 점유율을 확대하는 한편 고율 관세가 부과된 미국 수출 물량을 분산해 국내 생산거점을 지키려는 포석이다.
12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기아는 최근 아시아태평양 권역 본부 산하에 ‘말레이시아 법인 추진 TFT’를 신설했다. 기아가 아세안 지역에 판매법인을 설립하는 것은 태국에 이어 두 번째다. 업계 관계자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권역 본부가 주도하고 있는 프로젝트여서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아세안 시장을 정밀하게 확장해 나가려는 것" 이라며 “아세안 시장의 맹주인 일본 자동차 기업들의 독주를 깰 수 있을지도 관심”이라고 전했다.
말레이시아 판매법인은 현지 시장에서 브랜드 및 마케팅 전략을 직접 수립할 예정이다. 기아는 그간 현지 반조립(CKD) 공장에서 차량을 생산하고, 판매는 말레이시아 유통업체인 ‘버마즈 오토(Bermaz auto)’에 맡겨왔다. 기아 뿐 아니라 중국의 샤오펑, 일본의 마즈다 등을 동시에 유통하고 있어 판매량 확대에 한계가 분명했다. 현지 판매법인을 설립하면 주도적인 브랜드 전략은 물론 시장 변화에 대응한 유연한 가격 책정과 판촉 이벤트 등이 가능해진다.
말레이시아 자동차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다. 2021년 51만대 수준이던 시장 규모는 지난해 81만 6000대로 3년 만에 60% 가량 성장했다. 아세안의 다른 회원국과 달리 시장이 자국 브랜드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 것도 기회 요인이다. 말레이시아 현지 브랜드인 퍼르듀아(Perodua)는 약 40%의 시장 점유율을 보이는데 아지아·베자 등 소형차를 집중 생산하고 있다.
최근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아세안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차량 선호도가 다변화하고 있어 기아는 스포티지·쏘렌토 등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앞세워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또 말레이시아 정부가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해 소비세 면제, 도로세 감면을 추진하고 있어 향후 EV3 등 기아의 전기차 모델도 투입할 수 있다. 기아의 판매법인 설립은 현대차(005380)가 2030년까지 말레이시아에 CKD 공장 설립 등을 위해 21억 6000만 링깃(약 68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한 것과도 맞닿아 있다.
현대차그룹은 말레이시아를 발판으로 인구 7억명에 육박하는 거대 시장인 아세안 공략을 본격화할 방침이다. 아세안 시장은 완성차 세계 1위인 도요타를 포함해 일본 업체들의 점유율이 70%를 넘는 데 이같은 아성을 깬다면 현대차그룹이 도요타와 판매량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아세안 시장이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인한 불확실성 해소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대차그룹은 미국의 수입차 25% 관세에 대응해 앨라배마와 조지아 등 현지 공장의 생산량을 늘리고 있어 대미 수출 물량은 감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국내 생산량의 30% 이상을 미국으로 수출하던 구조를 바꿀 수 밖에 없어 새로운 활로가 필요했는데, 아세안 시장의 판매량이 확대되면 국내 생산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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