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뉴스를 보다 보면 ‘방탄 입법’이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방탄’은 총이나 칼 같은 무기를 막는 보호 장비를 뜻하고, ‘입법’은 국회에서 법을 제정하는 행위를 말하죠. 두 단어를 합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국회의원이 자신이나 동료 정치인의 수사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발의하는 법안을 지칭합니다.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이 행정부 산하에 있는 만큼, 주로 ‘정치적 표적 수사’라고 주장하는 야당이 방탄 입법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법안 처리 과정에서는 이를 막으려는 여당과 강행하려는 야당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곤 합니다. 특히 22대 국회 들어 ‘방탄 입법’이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유독 자주 등장했는데요. 어떤 법안들이 논란의 중심에 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대통령 되면 재판 중단…허위사실 공표선 ‘행위’ 삭제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한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어마어마한 방탄 입법을 강행했다.”(신동욱 국민의힘 수석대변인)
지난 7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형사소송법과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상임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피의자 이재명 방탄 입법 중단하라’는 피켓을 들고 거세게 반발했지만, 180석이 넘는 진보진영의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두 법안은 본회의에서도 무난히 통과될 가능성이 큽니다.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이라는 마지막 변수가 남아 있지만, ‘대대대행’이라는 이례적 상황에서 이주호 대통령 권한대행이 민주당의 강행을 저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법사위를 통과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대통령 당선 시 형사재판을 재임 기간 동안 정지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행안위에서 처리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허위사실공표죄의 ‘행위’ 요건을 삭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죠. 이에 맞서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은 ‘행위’ 기준을 더욱 명확히 하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치열한 여야 공방 배경에는 6·3 대선
그렇다면 왜 여당은 이 법안들을 저지하려 하고, 야당은 여론의 역풍을 감수하면서도 밀어붙이는 걸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6·3 대선 때문입니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9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은 이재명 후보는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한 인물입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보수 진영 후보들이 힘을 합쳐도 이 후보를 넘어서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사실상 그의 독주를 막을 변수는 단 하나, 바로 ‘사법 리스크’입니다. 이 후보는 총 8건의 사건 중 5건에서 형사재판을 받고 있어, 설령 당선되더라도 임기 내내 사법 이슈가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악재를 해소하는 것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관문인 셈이죠.
특히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의 ‘행위’ 요건은 이 후보가 과거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 판결을 받은 핵심 조항입니다. 이 요건이 삭제되면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면소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국민의힘이 “셀프 사면법”이라고 반발하는 배경입니다.
판·검사 처벌하는 ‘법 왜곡죄’…"겁박 의도"
‘방탄 입법’을 둘러싼 여야 간 공방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민주당은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 환송 직후, 법리를 왜곡하거나 사실관계를 조작한 판·검사를 처벌하는 ‘법 왜곡죄’ 도입과 대법관 정원을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법안도 발의했습니다. 국민의힘은 “이 후보를 기소한 검사와 유죄 선고를 할 판사를 겁박하려는 의도”라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민주당은 또 정당법 위반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특례를 적용하고,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범죄까지 소급적용하는 법안을 추진했지만 여론의 반발로 지난 2월 철회했습니다. 이 법안은 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과 관련된 수사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 발의돼 ‘맞춤형 면죄부법’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허위사실공표죄를 없애고, 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당선무효 기준을 100만 원에서 1000만 원으로 상향하는 법안도 논란을 낳았습니다.
입법 취지를 두고 민주당은 “헌정질서 수호”라고 답합니다. 이 후보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을 ‘선거 개입’이자 ‘내란 행위’라 규정하며 제도적 방파제를 구축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우리끼리 지켜줘야”…여야, ‘방탄 입법’ 추진 합심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여야가 함께 ‘방탄 입법’에 나선 사례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2011년 행안위를 통과한 정치자금법 개정안, 일명 ‘청목회 로비 면제법’입니다. 검찰이 청원경찰친목협의회(청목회)의 입법 로비를 수사하자, 여야 정치인들이 법인·단체의 후원금을 폭넓게 허용하는 법안을 의기투합해 추진했습니다. 법안은 상임위를 통과했지만 ‘방탄 특례법’이라는 거센 여론의 역풍에 결국 좌초됐습니다.
같은 해,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은 부인의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 위기에 몰리자 당선무효 기준을 완화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제 밥그릇 챙기기’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공동 발의자들도 ‘그릇된 의리’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한 채 법안을 철회했습니다.
이처럼 방탄 입법 논란은 특정 진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입법권자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법을 도구화할 때마다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정치가 국민과 민생이 아닌, 특정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도록 감시와 견제가 절실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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