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스페인 전국을 포함해 포르투갈 일부 지역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그야말로 어둠 속에 빠트린 초유의 대정전이 발생했습니다. 사고 발생 이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 전기 공급은 재개됐지만 무엇이 정전의 원인이었는지에 대한 공식 발표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요. 그 사이 ‘재생에너지를 무분별하게 확대한 것이 문제’, ‘기후변화가 원인’ 같은 여러 ‘설(設)’ 들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 사태가 주는 교훈은 생각보다 명료합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전력은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에너지는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태양광, 넘쳤거나 부족했거나
정전은 당일 오후 12시33분 스페인 마드리드의 전력망에서 15GW 규모의 전력이 갑작스럽게 사라지면서 시작됐습니다. 스페인 전국에서 하루 동안 사용하는 전력량의 60%가 단 5초 만에 ‘증발’을 해버린 것인데요. 전력망의 주파수가 유럽 전력망 표준인 50Hz 이하로 뚝 떨어진 것이 전력 손실을 알리는 단서입니다. 일각에서는 당시 전력망 시스템에 ‘매우 큰 진동’이 발생한 점을 미루어 유도 대기 진동이라는, 급격한 기온 변화로 인한 현상이 전력 손실을 가져온 원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다만 스페인 기상청은 당일 특이할 만한 대기 현상은 없었고, 원인이 될 만한 급격한 기온 변화는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전력 손실을 불러온 유력한 ‘용의자’는 태양광입니다. 전력 손실이 발생했을 당시가 정오 무렵인 만큼, 태양광 발전량이 갑자기 급등해 과부하를 일으켰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반대의 가설도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구름이 많이 끼어 태양광 발전량이 평소와 다르게 갑자기 줄었고, 이에 따라 전력량이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했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유럽 북서부에서는 최근 일조량과 풍량이 갑자기 감소하는 이른바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 현상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든 전력 공급이 당시의 전력 수요를 맞추는 데 실패한 것이 대정전의 시작이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원인은 복합적
이 같은 이유로 ‘정전의 원인은 태양광 포함 재생에너지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은데요. 출력이 불안정한 재생에너지가 결국 전력망에 무리를 준 게 아니냐는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스페인은 세계적으로도 재생에너지 선두 주자에 꼽힙니다. 2023년 기준 전체 발전 용량 가운데 풍력∙태양광∙수력 등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61.3%이고, 2030년에는 이 비중을 80%로 늘린다는 계획입니다. 현재도 스페인은 전체 전력의 40% 이상을 재생에너지 발전에서 얻는다고 하는데요. 재생에너지 비중이 전체 발전원 가운데 높아지기 전에는 이런 정전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재생에너지는 이번 정전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석탄이나 가스 화력 발전소의 경우 대형 터빈이 존재해, 전력 손실이 발생해도 터빈이 계속해서 돌면서 ‘관성’을 통해 전력망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재생에너지가 정전을 불러왔다고’만 보는 것 역시 무리가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보급률이 낮았던 2003년 이탈리아에서도 대규모의 정전이 발생했고요. 2021년 미국 텍사스에서 한파에 이어 정전이 들이닥쳤을 때에도 풍력 발전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는 했지만 당시 전체 전력원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천연가스(46%)이고 풍력은 23% 수준이었습니다. 즉 발전원 자체를 정전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전력망 노후화도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실제로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스페인의 태양광 발전 용량은 5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스페인의 전체 재생에너지 투자 가운데 전력망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30%로 유럽 평균인 70%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용량만 늘렸지, 인프라는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쟁 대상이 된 에너지, 익숙한 광경
결국 에너지 편중, 핵심은 전력망 안정성입니다. 발전원이 무엇이든, 어떤 식으로 전환이 이뤄지고 있든 전력망이 불안하면 전력 공급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AI) 일상화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시대, 그리고 과장을 조금 보태면 ‘모든 것이 전기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최우선 과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에너지 편중은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온다는 점입니다. 탄소 감축을 위해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더라도, 출력 변동성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화력 발전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전력망을 고도화하면 재생에너지만 사용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국제 싱크탱크인 에너지전환위원회(ETC)에 따르면 유럽 지역의 전력망을 개선하기 위해 향후 10년 동안 5840억 유로(약 925조 원)라는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전 이후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보면 이번 사태가 주는 교훈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스페인에서도 에너지는 정쟁의 대상입니다. 스페인 야권은 정부의 원전을 배제한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드라이브가 정전을 불러왔다고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고,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그런 야권의 주장이 “무지한 주장이거나 거짓말”이라며 정부 정책 책임이 아니라고 강경한 입장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정치적 공방 속에 ‘에너지는 균형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겠죠. 특정 발전원만 강조하는 정치적 주장과 이것이 정책으로 그대로 현실화하는 것. 이것이 대정전의 ‘진범’이 아닐까요. 특히 그 사이 전력망 투자는 소홀했다는 점은 에너지를 에너지가 아닌 정치 수단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한국과 상황이 비슷하다는 점을 느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도 에너지가 뜨거운 정쟁 소재이기도 하고요. 재생에너지 용량이 늘어난 데 비해 송배전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점도 닮은 점입니다. 특히 스페인은 유럽 인근 국가로 이어지는 전력 연결망이 부족해 ‘에너지 섬’으로 불린다고 하죠. 이 점은 한국과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이베리아 반도의 정전 사태가 한반도에 주는 교훈이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석유(Petro)에서 전기(Electro)까지. 에너지는 경제와 산업, 국제 정세와 기후변화 대응을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기사 하단에 있는 [조양준의 페트로-일렉트로] 연재 구독을 누르시면 에너지로 이해하는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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