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독립적 여성 캐릭터가 많지 않았어요. 멜로에서 남성 캐릭터의 상대역이 주였기에, 저는 밀려났었죠."
영화 ‘파과’에서 60대 여성 킬러 조각 역을 맡은 배우 이혜영(사진)은 28일 삼청로의 한 카페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이런 자리와 관심이 너무 낯설다”라면서도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외모 때문에 ‘리즈 시절’에 주변부에 머물렀던 자신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듯 복잡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더니 ‘이제 나의 시대가 왔다'라는 시그널을 받은 듯 희망 찬 표정으로 빠르게 장면전환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난 2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스페셜 섹션에 초청돼 공개됐던 당시 '존 윅', '테이큰' 등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비교되며 극찬을 받았고 국내 언론의 반응도 다르지 않자 조심스럽게 기대감을 낸 것이다. 이혜영은 당시 “압도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독보적인 아우라의 여성 캐릭터를 만들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구병모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은 늙고 쇠약해진 여성 킬러가 젊은 킬러 투우(김성철 분)과 대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독보적인 분위기와 서구적 외모로 인해 과거 한국 여성 캐릭터에는 딱히 맞는 배역이 없었다. 그런데 그동안 사회는 너무 다양해졌고, 우리 모두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즉 그가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 그동안 쌓아온 관록의 여배우 아우라를 선보이며 만개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여자친구, 엄마, 할머니가 아닌 여성 캐릭터도 주인공일 수 있는 시대에 어쩌면 그는 이미 도달해 있었는지도. 그래서 과거에는 만날 수 없었던 60대 여성 킬러가 그에게 온 것이다. 소설 팬들 사이에서는 영화화된다면 조각 역에 그가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이 이미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이혜영은 “사실 조각과 닮은 부분이 없는데 왜 나일까라는 생각을 했다”며 “그런데 전설적인 킬러로 불리게 된 수수께끼 같은 힘의 원천이 무엇일지 궁금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와 캐스팅을 허락했다”고 설명했다.
60대 여성 킬러라는 캐릭터는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하다. 대표적인 여성 킬러 영화 ‘킬빌’이 있지만 우마 써먼이 연기한 비어트릭스 키도는 젊은 여성이다. 조각은 파뿌리같은 흰머리가 가득한 노년 킬러로 그가 혼신을 다해 휘두르는 액션에는 회한이라는 서사가 연기의 깊이를 더한다. 그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라서 촬영 내내 두려우면서도 도전하는 자세로 임했고, 액션을 찍다가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는데 삭제된 장면도 있어 억울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베를린에서 평가가 너무 좋아서 기대가 되지만 막상 개봉을 앞두니 굉장히 긴장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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