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중국계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인공지능(AI)의 대두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리사 수 AMD CEO는 ‘슈퍼스타’가 됐다. 하지만 그들은 1960년대생 ‘노장’이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長江後浪推前浪) 실리콘밸리에서도 20대 중국계 창업자들이 주목받고 있다. 2021년 불과 24세에 세계 최연소 ‘자수성가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알렉산더 왕 스케일AI CEO가 대표적이다.
스케일AI는 AI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를 자동 분류해주는 스타트업이다. 현재 기업가치가 무려 140억 달러(약 20조 원)에 달한다. 거래처 목록에는 오픈AI는 물론 미 국방부도 있다. AI 산업의 주춧돌로서 그 변화를 중심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왕 CEO는 최근 AI 정책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달 4일(현지 시간) 그는 이코노미스트에 ‘중국이 AI 기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냈다. 그의 부친이 맨해튼 프로젝트의 ‘심장’인 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 출신 중국계 물리학자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의미심장한 발언으로 읽힌다.
그는 AI 발전에 따른 ‘에이전트 전쟁(agentic warfare)’을 예고하며 “AI를 군사적 의사 결정에 통합하는 첫 번째 국가가 21세기 역사를 좌우한다”고 역설했다. AI 에이전트가 “인간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전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도록 해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한 군대가 아무리 유능한 적이라도 압도하며, 기술적으로 열세인 군대는 게임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파악하기도 전에 패배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왕 CEO는 딥시크가 “중국의 AI 역량이 야망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중국 인민해방군이 모든 주요 전투 기능에 걸쳐 AI를 배치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공상과학처럼 들릴 수 있지만 에이전트 전쟁은 이미 현실이며 먼저 숙달하는 자가 디지털은 물론 물리적 전장도 지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에릭 슈밋 구글 전 CEO와 ‘초지능 전략’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고 AI의 ‘상호확증무력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핵무기의 ‘상호확증파괴(MAD)’처럼 범용인공지능(AGI) 간 상호 무력화가 이뤄져야 파멸적인 결과를 피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또 핵무기를 선제 개발하는 데 집중했던 맨해튼 프로젝트가 결국 다른 나라의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했듯 미국이 먼저 AGI를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경쟁국의 개발을 늦춰야 한다는 논리다.
중국을 정조준한 메시지다. 과거 냉전 당시 팽배했던 ‘소련과의 핵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이제는 ‘중국과의 AI 전쟁’으로 변주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미국과 중국 등 패권국이 소버린(주권) AI 구축을 과거 핵무장 등 안보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도 엿볼 수 있다. 옛 소련 시절 핵무기를 쥐지 못한 국가들이 각각 미국과 소련의 핵우산 아래 기댔던 것처럼 소버린 AI를 구축하지 못하면 미국과 중국의 ‘AI 우산’ 아래 들어가야 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는 자체 AGI 개발이 가능할까. 소프트뱅크와 오픈AI의 스타게이트 동맹에서 엿볼 수 있듯 일본은 미국 AI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방향을 택한 듯하다. 문제는 미국의 태도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파이브아이즈’의 일원인 캐나다조차도 내칠 태세다. 이제 과녁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를 향할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국제 정세와 기술이 급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다. 미국의 시선이 한국을 향하기 전에 조속히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 한국만의 소버린 AI 구축이 불가능하다면 선택지는 서구 진영일 수밖에 없다. 안보는 백년대계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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