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서울시 구로구 고대구로병원 본관 1층 로비. 휠체어에 탄 한 중년 남성이 조준민 응급중환자외상외과 교수에게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당황한 기색을 읽어낸걸까.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른 뒤 환자는 "제가 교수님 덕분에 살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머쓱해하며 돌아서던 순간 조 교수의 머릿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몇달 전 야간 당직을 서던 날 추락 사고를 당해 여러 군데 골절이 생기고 골반 골절에 의한 간손상까지 입은 채 119구급대에 실려왔던 환자였다. 조 교수의 응급 처치 후 호출을 받고 합류한 외상팀 소속 의료진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수술장으로 옮겼다. 수술을 무사히 마친 후 경과가 회복돼 재활 치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마지막 기억이다. 어느새 퇴원해 외래 통원치료를 받으러 온 모양이었다.
조 교수는 “대부분의 환자가 공사장처럼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교통사고 등으로 심한 손상을 입은 채 실려온다. 얼굴만 봐선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운을 뗐다.
◇ 고강도 업무 시달리는 외상외과…“건강해진 환자 모습 보면 고단함 사라져”
그의 기억 속 환자들은 진단명이나 찰나의 순간 머물렀던 병상 번호 등 피로 얼룩진 응급실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일주일에 이틀 꼴로 당직을 서는데 24시간이 지나도 곧장 귀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가물가물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경각에 달렸던 환자가 몰라보게 건강해진 모습을 볼 때면 고단함이 일순간 사라진다.
조 교수는 "지극히 평범해 보여도 그 순간이 가장 기쁘다"며 "힘든 고비를 넘기고 살아 있어줘서 너무 고맙다"고 전했다. 전공을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면 어떨 것 같느냐는 질문에는 "돌아가도 (외상외과를) 다시 할 것 같다"고 했다.
◇권역 외상센터 설립 이후 10여년…“중증외상 분야 지원 여전히 아쉬워”
조 교수는 2005년 인턴 수련을 시작하던 때부터 20년간 고대구로병원에 몸담았다. 애초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이른바 바이탈과에 대한 열망이 컸다. 그러던 중 외과 전공의 시절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10대 환자를 사흘밤 연속 떠나보냈던 충격적인 경험 이후 ‘외상외과’는 그에게 사명이 됐다. 당시는 2011년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옛 아주대병원 교수)이 조명 받으며 중증외상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졌던 시기였다. 이듬해 ‘이국종법(중증외상센터 설립을 위한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전국에 권역별 외상센터가 만들어질 길이 열렸고, 그가 전임의(펠로)를 마칠 때쯤 고대구로병원이 보건복지부의 서울지역 외상전문의 집중 육성 수련병원으로 지정됐다. 돌이켜보면 대내외적 상황이 급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외상전문의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정부의 예산 문제로 문닫을 위기에 처했다가 최근 서울시의 긴급 지원으로 회생한 '중증 외상전문의 수련센터'의 1기 교육생을 시작으로 지도전문의로서 후학 양성에 기여한 지도 어느덧 11년을 꽉 채워간다.
◇ 드라마와는 딴판…“천재 의사 한명보다 진료과간 협업 시스템이 핵심”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가 인기를 끌면서 외상전문의는 주인공 백강혁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혹시 드라마를 보았느냐고 물으니 “주변에서 하도 재미있다고 해서 1화를 켰는데 끝까지 보진 못했다”고 했다. 극적 재미를 더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겠지만, 의료 현장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아 공감하기는 어려웠다는 얘기다. 특히 극중 백강혁이 대장항문외과 레지던트 출신 양재원을 “야, 항문”이라고 부르는 장면을 가장 불편한 대목으로 꼽았다. 대장항문외과 뿐 아니라 신경외과, 마취통증의학과 등 다른 진료과들을 평가절하하는 연출이 혹시라도 쓸데 없는 오해를 낳을까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천재의사 한 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절벽 위 응급 환자를 구하기 위해 겁에 질려 울부짖는 레지던트를 어깨에 들쳐업고 헬기에서 하강하는 장면은 물론, 굳이 헬기 안에서 환자의 두개골을 뚫어 뇌수술을 강행하고 수술 장갑으로 심장파열 부위를 막는 행위 등은 기행에 가깝다.
◇ 예방 가능 외상 사망률 13.9%까지 낮아졌지만…선진국에 못 미쳐
조 교수는 “자칫 드라마가 외상 치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까 우려스럽다”며 “현실에선 스타 의사가 아니라 외상외과, 대장항문외과, 간담췌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등 여러 진료과와 다양한 부서가 긴밀하게 협업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병원 내 중증외상 치료를 위한 시스템이 갖춰지고 외상외과가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게 이상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중증외상 환자 치료에 특화된 권역외상센터가 본격적으로 운영되고 정부의 지원이 이뤄지면서 전반적인 응급진료체계는 그동안 상당히 개선됐다. 2015년 30.5%였던 예방 가능 외상 사망률은 2021년 기준 13.9%까지 절반 이상으로 줄었다.
특히 서울의 경우 2015년 30.8%에서 2019년 20.4%로 9.8%포인트 낮아졌다. 고대구로병원은 서울시 중증외상 최종치료센터 4곳 중 환자 수가 가장 많고 중증도가 가장 높은 데도 재전원율(다른 병원으로 옮겨지는 비율)은 0%에 가깝다.
하지만 현장 의료진들의 갈증은 여전하다. 우리나라보다 40년 이상 먼저 중증외상시스템을 도입한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예방가능 외상사망률은 5% 미만이다.
◇ 지속 가능한 중증외상 치료 시스템? 드라마 인기 꺾여도 꾸준한 관심 절실
조 교수는 운전 중 사고로 췌장이 파열돼 응급 수술을 받았던 한 환자가 돌연 사망했던 아픈 기억을 끄집어냈다. 입원치료를 받은지 한달 가까이 지났고 나름 경과가 좋았는데 하필 자리를 비운 날 밤 응급상황이 발생했다. 벌써 5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살릴 수 있었던 환자를 떠나보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달 가까이 잠을 못 잤다”며 “그런 기억들이 쌓이다 보니 당직이 아닌 날도 병원을 비우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가장 큰 고민은 ‘지속가능성’이다. 올해 46세인 조 교수는 가끔 ‘10년 뒤엔 어떨까’ 생각에 잠긴다고 한다. “병원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중증외상센터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기한이 정해진 사업 형태로 운영되는 한 수련센터처럼 언제든 운영 중단 위기에 처할 수 있죠. 중증외상 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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