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날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지칭하면서 한반도 안보 지형을 둘러싼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의 발언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온 만큼 의도가 분명치는 않으나 지금까지의 북핵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북핵 인정과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스몰딜’을 추진할 수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20일(현지 시간)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엄청난 위협으로 간주했지만 이제 그는 ‘핵보유국’이 됐다”며 “그는 내가 돌아온 것을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백악관 오벌 오피스 책상에 앉아 여러 행정명령을 서명하면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는 와중에 나왔다. 한 기자가 “2017년 백악관을 떠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주요 안보 위협으로 북한을 지목한 것처럼 이날 퇴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어떤 위협을 지목했나”라고 물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언급한 것이다. 트럼프는 이날 경기도 평택 주한미군 기지 캠프 험프리스 장병들과의 영상통화에서도 한국의 상황에 대해 높은 관심을 드러내며 “내가 비록 그(김정은)와 매우 좋은 관계를 발전시켰지만 그는 터프한 녀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김 위원장을 ‘핵보유국’이라고 언급한 것이 미국이 북핵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는 아직 이르다. 트럼프의 즉흥적 성향을 감안할 때 단순히 북한이 미국 본토를 위협할 무시 못할 핵 능력을 보유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핵을 보유한 것으로 인정하는 핵무기 국가(nuclear weapon state)는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5곳이며 핵보유국은 여기에 핵을 가진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들 국가는 북한과 달리 핵 보유와 관련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김정은과 북핵에 대한 트럼프의 지속적인 관심은 그가 집권 2기 북한과의 ‘톱다운’ 협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김정은을 자신과의 협상 테이블에 다시 앉히기 위한 고도의 계산된 발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서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무의미한 협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는 중국과의 경쟁이라는 더 큰 목표에 집중하려 하고 있다”고 짚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면서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만 줄이는 군축 협상, 이른바 스몰딜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이런 방식의 ‘미국 우선주의’ 북미 협상을 벌인다면 북한 비핵화를 추진해온 우리 정부는 그 과정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국내 전문가들도 트럼프가 북한의 핵 보유를 공식 인정한 것은 아니라면서도 비핵화가 아닌 북미 스몰딜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교수는 “트럼프가 향후 북한과 핵 동결 등 스몰딜을 추진할 텐데 이에 따른 대응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전략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만큼 트럼프 정부와 북한 간 협상 과정에서 우리가 배제될 수 있다”며 “전향적 태도로 (미국과 협상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트럼프의 발언에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북한의 비핵화 목표를 거듭 강조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북한 비핵화는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지속 추진돼야 한다”면서 “정부는 북한 비핵화를 위해 국제사회와 계속 긴밀히 공조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 역시 “한미는 그동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에 대해 확고하고 일치된 입장을 견지해왔다”면서 “미국 새 행정부와 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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