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밤 기습 계엄이 ‘6시간 천하’로 막을 내리며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국민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직장인들은 평소처럼 출근길에 나섰지만 여전히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시민들은 서울 광화문·국회 등 도심 곳곳에 집결해 대통령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전국 대학에서 시국 선언이 잇따르는 가운데 시민단체들도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촛불 시위를 예고해 2016년 탄핵 정국이 재연될 조짐이다.
4일 오전 출근길에 찾은 서울 서초구 고속터미널 앞 버스 정류장에서는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는 이들이 평소보다 많이 눈에 띄었다. 전날 밤 갑작스런 비상계엄 소식에 밤잠을 못 이룬 탓인지 피곤함도 엿보였다.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인근 병원으로 향하고 있던 한 중년 부부는 “깜짝 놀라서 잠을 두 시간도 못 자는 바람에 너무 피곤하다”고 전했다. 역시 불안한 마음에 한 숨도 못 잤다던 직장인 박 모(52)씨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내란죄에 해당될 정도라고 본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간밤 시민들이 몰려들었던 국회 앞에서는 계엄이 해제된 이날 오전에도 수십여 명이 귀가하지 않고 차도까지 점거한 채 계엄 사태를 규탄했다. 국회의사당 정문 앞은 “윤석열을 체포하라”고 외치는 각종 시민단체 회원들과 인도를 둘러싸고 길게 늘어선 경찰들로 혼잡했다.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광장 또한 이른 아침부터 긴급 단체행동에 나선 정치권과 시민단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민주노총은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할 때까지 총파업을 열겠다고 밝혔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윤석열의 비상계엄 시도는 절차와 내용적 정당성을 결여한 반민주·반헌법적 폭거”라고 규정했다.
저녁이 되자 일과를 마친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면서 시위 열기가 더욱 불붙었다. 민주노총 주최로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내란범 윤석열 퇴진 시민대회’에는 집회 시작 1시간 만에 주최 측 추산 1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동화면세점 앞 현장에서 만난 변 모(34) 씨는 “이런 집회를 온 것 자체가 처음”이라며 “당장 이번주 토요일 촛불행동도 참석해 힘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인천에서 온 고등학교 3학년 김 모(19) 양은 “오늘 실용무용 실기고사가 예정돼 있었는데 계엄 사태로 인해 시험을 못 보게 될까봐 너무 걱정이 됐다”며 “다행히 시험은 봤지만 대통령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집회에 나오게 됐다”고 했다.
전날 계엄군이 진입을 시도했던 국회 앞에서도 주최 측 추산 5000명 이상의 시민이 모였다.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본관 앞에서 개최한 ‘촛불문화제’에는 민주당 인사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모여 “윤석열을 체포하라” 등 구호를 연신 외쳤다. 이날 현장엔 중·고등학생이 발언자로 나서는 등 앳된 얼굴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그 영향인지 시민들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시대’를 떼창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등 마치 축제처럼 시위에 나섰다. 수원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온 박 모(23) 씨는 “대학원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계기로 집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아직 현장이 조금 어색하지만 의미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누적된 시민 분노가 간밤을 기점으로 폭발하면서 이날부터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줄줄이 열릴 예정이다.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촛불집회는 2016년 탄핵 정국 이후 8년 만이다.
대학가에서도 시국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성명을 내고 “불의에 항거하는 4·19 민주 이념을 무참히 짓밟은 행위를 규탄한다”고 밝혔다. 동국대에서도 학생 108명이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정권 퇴진을 촉구했다. 고려대 교수와 연구자 370여 명도 이날 긴급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윤 대통령의 직무 정지와 탄핵 등을 촉구했다. 교수 단체인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정교모)’은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해제 사태와 관련해 국회 조기 해산과 개헌·국민투표 등으로 나라를 다시 만드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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