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새벽 1시 50분. 한미연합 첩보부대가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섬을 탄환하고 이곳 등대를 점등한다. 1/5000의 확률로 성공한 인천상륙작전의 신호탄이다. 인천상륙작전을 둘러싼 치열한 첩보전을 그린 영화의 소재로 활용된 ‘팔미도 등대’의 얘기다.
팔미도 탄환은 인천상륙작전에 나서는 미군,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로 구성된 유엔군에게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작전이었다.
팔미도의 등대는 1903년 6월 1일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 연안의 무인도에 높이 7.9m, 지름 2m 규모로 지어졌다. 건축재료는 콘크리트와 대리석으로, 이는 바닷물 부식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등명기 또한 당시 가장 유명한 프랑스 회사의 기술을 도입한 전기 회전식 6등급으로 10㎞ 밖에서도 불빛을 볼 수 있다.
이곳에 등대가 세워진 데에는 팔미도가 서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해상교통 흐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섬의 남쪽과 북쪽이 모래와 자갈로 이어져 ‘여덟 팔(八) 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팔미도라 불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팔미도 등대의 건립은 일본과 서구열강과 같은 외세에 의한 강압적으로 지어졌다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인천 개항 당시 연안에 등대 설비가 없어 발생하는 외국 선박의 해양사고를 예방하고자 설치됐지만, 사실상 조선 침약을 위해 진출한 자국 선박을 보호하고자 지어진 셈이다.
기존 팔미도 등대는 2003년 12월 그 기능을 다하고 현대적 조형미를 갖춘 100주년 기념 상징 조형물인 ‘천년의 빛’으로 교체되면서 연구보존하게 됐다. 인천시는 퇴역을 1년 앞둔 2002년 근대의 빛을 비춘 이 팔미도 등대를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한다.
새 등대는 전망대와 등탑을 갖춘 높이 31m에 지하 1층·지상 4층 현대식 건물로 건축됐다. 위성항법보정시스템과 같은 첨단장비를 갖추고 기상관측과 연안 해양관측까지 맡고 있다.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인 팔미도 등대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것은 2009년 1월 1일부터다. 이전까지는 등대가 만들어진 후 군인과 등대지기 말고는 일반인 출입은 허락되지 않았다.
팔미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팔미도행 유람선을 타고 2시간 정도 가면 된다. 날씨가 좋을 때 새로 지어진 팔미도 등대전망대에서 인천항과 인천대교를 바라보고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를 쭉 돌면 영흥대교, 영흥도, 자월도, 무의도와 인천공항을 바다 한 가운데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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