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억 달러(약 58조 6000억 원). 지난해 미국과의 무역에서 우리나라가 창출한 흑자 규모다. 전 세계적인 고금리와 공급망 쇼크 속에서도 대미 수출은 지난해 5.4% 상승해 역대 1위 실적을 달성했다. 미국 현지에서도 ‘메이드 인 코리아’는 몸으로 감지된다. 도로 곳곳에서 현대차·기아의 친환경 차를 만날 수 있고 우리 기업들이 잇따라 미국 공장을 지으면서 각종 기자재의 수출도 급증하고 있다. 이 같은 무역수지 개선이 미중 전략 경쟁과 미국의 공급망 재편 속에서 이뤄졌다는 점은 더 의미 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각종 ‘미국 우선주의’ 움직임 속에서도 한국 기업들의 저력이 확인된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역대급 대미 무역흑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반갑지 않아 보인다. 현지에 있는 주재원 사이에서는 되레 “흑자 규모가 다소 부담스럽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야 할 수치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이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은 올해 미국이 대선을 앞두고 있고 가장 유력한 후보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 직전에 받아든 최고의 대미 무역수지 성적표가 불과 1년 후 우리 기업들을 ‘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실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임 1기와 현재 그의 공약들을 살펴보면 이 같은 우려는 매우 현실적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100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끔찍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재협상하거나 종료하겠다”고 폭탄 발언을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미 FTA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것도 바로 미국의 무역적자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의 경제팀은 무역적자를 미국 경제의 약점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보며 어떤 과격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낮추는 것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둔다.
재선에 도전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는 이미 ‘고율 관세’를 정책의 전면에 내세운 상태다. 최근 워싱턴DC에서 만난 트럼프 정부 시절의 한 경제 참모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 모두 ‘미국 우선주의’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이를 보조금으로 해결하려 한 데 반해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즉 무역정책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본다”고 말했다. 통상정책 권위자인 애덤 포즌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소장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어떤 과격한 공약을 하든, 그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폭탄 관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전기차와 친환경 산업에서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격변이 예상된다. 미 의회를 통과한 IRA와 반도체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이 트럼프 2기에서 가까스로 유지된다 해도, 실제 집행 과정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각종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앞서 바이든 대통령이 추진해온 전기차 전환 정책을 ‘광기’라고까지 표현하며 “즉시 멈추게 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이달 15일(현지 시간)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열리는 공화당 첫 경선(코커스)을 시작으로 미국의 대선 레이스는 본격화한다. 현지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지지가 더 확산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최근 기자가 만난 한 우버 기사는 “바이든이 우크라이나에 지금까지 쓴 돈이면 미국 경제를 살리고도 남았다”면서 “나는 이민자지만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트럼프 2기 출범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할 때가 왔다. 트럼프 참모들과 끊어진 네트워크를 복원하고 한미 공급망을 유지할 논리를 개발하며 최악의 경우 미국과의 무역전쟁까지 대비해야 한다. “설마 또 되겠냐”는 안일한 생각으로 올해 미국 대선을 지켜보다가는 트럼프라는 회색 코끼리가 우리 경제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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