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회 시정연설에서 한껏 몸을 낮춘 윤석열 대통령이 민심 챙기기에 열심이다. 자영업자를 만나서는 ‘종노릇’ ‘갑질’ 등의 원색적 용어로 은행을 작심 비판하더니 연구개발(R&D) 예산 감축으로 심기가 불편한 대덕 연구원들을 만나서는 진의가 왜곡됐다며 이들을 달랬다. 보궐선거 패배로 책임론이 불거졌던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김포의 서울 편입, 이른바 ‘메가 서울’ 이슈로 반전에 성공했다. 이에 질세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3% 성장론을 띄웠다. 경기가 어려운데 돈을 더 풀어 성장을 꾀해야 한다며 현 정부의 긴축 기조에 날을 세웠다.
그야말로 총선 시즌이다. 정치권 공기마저 달라지고 있다. 정당의 내공과 선거 전략이 총동원되는 느낌이다. 유권자의 주의와 환심을 사기 위해 말의 성찬이 난무하는 지대가 바로 정치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 못 할 것은 없다. 이슈별 문제를 짚어본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순기능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꺼림칙하다. 정치권이 우리가 직면한 본질적 어려움을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 경제를 한번 보자. 벼랑 끝에 섰다는 표현이 빈말이 아니다. 에너지의 94%를 수입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의존도가 80%가 넘는 나라가 한국이다. 교역으로 먹고사는 만큼 경제 불확실성의 진원지인 2개의 전쟁(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미중 간 신냉전의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실제 10월 물가는 3.8% 치솟았다. 이번에 물가가 수그러들 것으로 봤던 한국은행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기에 올해 우리 성장률(1.4%, IMF 기준)은 일본(2.0%)보다도 낮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내년은 2.2%로 수직 상승할 것이라고 서운함을 토로했지만 중국을 비롯한 세계 성장률이 내년에 더 암울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만 V자로 발딱 일어설지 솔직히 불투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얼마 전 내년 물가 전망이 배럴당 84달러 유가를 전제한 것이라며 90달러가 되면 이를 고쳐야 한다고 한 발 뺐다.
더 갑갑한 것은 현실을 호도하는 유력 정치인들의 후안무치다. 이 대표는 내년 3% 성장을 얘기했지만 전임 문재인 정부의 5년간 평균 성장률은 고작 2.28%였다. 외환위기를 정통으로 맞은 김대중 정부(5.62%), 금융위기를 치른 이명박 정부(3.34%)보다 낮다. 코로나 핑계를 대기도 겸연쩍다는 뜻이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 시절 5년간 국가채무는 400조 원 폭증했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고작 채무 탕감, 재정 퍼주기, 지역화폐 부활, 1년 한시 임시소비세액공제로 3% 성장을 달성한다는 이 대표의 장밋빛 청사진은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내년 국채 이자만 28조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판에 ‘또 빚내서 돈 뿌리자’는 얘기는 정부의 경기 대응력을 더 훼손하고 물가만 올려 고금리를 장기화할 뿐이다. 서민을 더 궁지로 내몰 악수가 될 수 있다.
이 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급부상한 가계부채 문제도 냉정히 봐야 한다. 예대마진 꼼수를 부리는 은행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그렇다고 정부의 특례보금자리론 풀기,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상품 판매, 시장 정상화를 이유로 한 취득세·양도세·종합부동산세 등 각종 세금 완화, 공급 부족에 대한 불안감이 대출 확대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따질 것은 제대로 따져야 뒤탈이 없다. 시시비비 없이 사태의 희생양 삼듯 카르텔과 기득권 세력을 지목해봐야 시장의 면종복배만 불러 후일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양산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기준점이 강한 사회다. 그래서 리더의 한마디, 한마디는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한다. 특히 현재와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거 국면에서 터져 나오는 리더의 말은 위력이 더 세다. 일자리와 연계된 제조업 산업 전환, 급격한 생산가능인구 감소를 메울 고용·노동 현안, 세대 갈등 해법의 시금석이 될 연금 정책 등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는, 그래서 곱씹어 볼 말이 많이 터져 나와야 우리 사회가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 포퓰리즘에 기대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요령부득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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