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리퍼블릭으로 옮겨붙은 글로벌 은행 위기의 불씨가 좀처럼 꺼지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는 퍼스트리퍼블릭이, 유럽에서는 크레디트스위스(CS)가 각각 하루 100억 달러 이상의 예금 유출을 겪으며 붕괴 우려를 키우고 있다. 미국 중소형 은행들이 더 이상 금융소비자들을 안심시키지 못하는 신뢰의 위기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 당사자들은 주말도 불사하고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현재 금융위기 전이의 잠재적 진원지로 떠오르고 있는 CS에 대해 UBS가 최대 1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사태 악화를 조기에 막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19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UBS가 최대 10억 달러를 주고 CS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고 인수 계약이 이날 저녁에 서명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스위스 당국은 20일 이전에 인수를 마무리하기 위해 주주 투표를 우회할 수 있도록 법안을 변경할 계획이다. 일부 주주들에게서는 UBS가 주주 투표를 우회하는 방식이 정상적인 지배구조 규칙을 무효화 하는 방법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 경제 매체 배런스는 “이번 거래가 이뤄진다면 금융 업계의 오랜 걱정거리가 해결되는 것”이라며 “이는 은행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발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18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내 110개 이상의 은행이 속한 중견은행연합(MBCA)은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와 재무부에 “앞으로 2년간 모든 예금에 대해 FDIC의 보험을 적용해달라”고 서면 요청했다. 현재 FDIC의 예금보험은 은행당 25만 달러 이하의 예금계좌에만 적용된다. MBCA는 “은행 전반은 여전히 튼튼하지만 큰 은행을 제외한 모든 은행에서 고객의 신뢰가 꺾이고 있다”며 “은행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즉시 회복해야 하며 다른 은행이 도산할 경우 예금 유출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정부 차원의 대책을 촉구했다. 이는 10일 실리콘밸리은행(SVC) 폐쇄 이후 중소형 은행에서 불안함을 느낀 예금주들이 JP모건체이스 등 초대형 은행으로 예금을 옮기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연방정부 차원의 사전 조치를 요청한 것이다.
실제 금융 불안은 미국 정부의 각종 대책에도 쉽게 진정되지 않는 분위기다. 16일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을 필두로 한 미국 11개 대형 은행이 300억 달러를 지원했지만 이마저도 먹히지 않고 있다. 퍼스트리퍼블릭의 주가는 지원을 받은 다음 날 10% 상승했지만 이튿날에는 33% 하락 마감했다. 대형 은행의 수혈보다 예금주들의 이탈세가 더욱 가파르기 때문이다. 미국 투자은행 제프리스는 퍼스트리퍼블릭에서 빠져나간 예금이 지난주에만 89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지원받은 자금의 세 배다.
이에 퍼스트리퍼블릭이 단독 생존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루미스세이레스앤코의 분석가인 줄리안 웰레슬리는 “퍼스트리퍼블릭을 독립적인 주체로 볼 수 있을지 명확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와 관련해 “퍼스트리퍼블릭의 지분에 대한 비공개 매각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총력전에 나서는 분위기다. 미국 정부는 다이먼 회장을 통해 은행권에서 300억 달러 지원 방안을 이끌어낸 데 이어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최고경영자(CEO)와도 수차례 전화 회담을 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버핏 CEO는 2008년 골드만삭스와 2011년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어려움을 겪을 당시 각각 50억 달러를 투자해 상황 진화를 도운 바 있다.
일각에서는 금융 불안이 안정되지 못할 경우 금융기관이 예금 감소에 대응해 대출을 줄이면서 신용 경색이 가시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 연준 부의장인 리처드 클래리다 핌코 경제고문은 “이제 우리는 (고객이 은행을 믿지 못하는 문제에 이어) 은행이 고객에게 대출을 연장해줘도 될지 망설이는 또 다른 신뢰의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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