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TV 등 가전제품용 강판을 생산하는 포스코 광양제철소 도금강판 생산 라인 한 곳이 셧다운에 들어갔다. 경기 침체로 가전 수요 둔화가 이어지자 25년간 이어온 가동을 중단한 것이다.
가전제품에 대한 글로벌 수요절벽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급기야 소재를 공급하는 철강 분야로 충격이 확산되는 모양새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광양제철소는 지난주 2EGL(전기아연도금라인) 가동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양 2EGL에서는 냉연, 소둔공정을 거쳐 생산된 냉연코일을 소재로 전기아연도금 공정을 더해 도금강판 제품을 생산해왔다. 1997년 가동을 시작한 이 공장은 25년 동안 도금강판 등 650만 톤의 제품을 생산해 연간 매출 6조 6000억 원을 달성했다. 2EGL에서 생산된 제품은 TV·냉장고·세탁기 등 가전제품의 핵심 소재가 됐다.
◇가전·車 침체 '더블 타격'…포스코, 조강 생산도 10% 줄였다
글로벌 가전산업의 중추 역할을 해온 도금강판 생산 라인이 멈춰선 것은 그만큼 글로벌 가전산업이 정체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0년 2억 1700만 대에 달했던 글로벌 TV 출하량은 2021년 2억 1000만 대, 2022년 2억 200만 대로 떨어졌고 올해는 1억 9900만 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됐다. 출하량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2억 대가 무너지는 것이다.
국내 가전제품의 해외 수출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실제로 지난해 4분기 국내 가전 수출액은 15억 9200만 달러로 전년 동기의 22억 800만 달러보다 27.8%나 쪼그라들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실적도 불안하다. 증권가에서는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의 영업이익을 전 분기 대비 30% 줄어든 2000억 원대로 예상했다. LG전자 역시 이날 발표한 지난해 영업익이 전년 대비 12.5% 줄어들었다. 가전 시장 침체로 포스코의 도금제품류 생산량도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포스코의 3분기 기준 도금제품 생산량은 502만 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 줄었다.
포스코 관계자는 “글로벌 가전 시장 정체 등 급변하는 경영 여건에 대응하기 위해 셧다운을 결정했다”며 “기존 2EGL에서 생산하던 일부 제품은 광양과 포항제철소로 나뉘어 라인별 특성에 맞춰 생산을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가전 시장 수요 감소에 전후방 산업 충격파가 이어지고 있다. 가전제품 수요 감소로 가전사의 생산이 줄어들고 철강사의 고부가가치 제품인 도금강판과 고로 쇳물 생산까지 축소되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중이다. 특히 올해는 국내 자동차 생산도 감소 추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면서 중간재·최종재 산업 모두 기초 체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LG전자·위니아전자 등 국내를 대표하는 가전 기업들은 글로벌 수요절벽으로 실적에 타격을 입고 있다. 6일 삼성전자는 2022년도 4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69%나 줄어든 4조 3000억 원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분기 영업이익이 4조 원대로 쪼그라든 것은 8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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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영업이익 악화는 주력인 메모리반도체 판매량 감소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회사 매출의 중요한 축인 가전·TV 사업 부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의 영업이익을 전년 동기(7000억 원) 대비 반 토막 난 2000억~3000억 원대로 추정한다.
LG전자도 지난해 4분기 녹록지 않은 시장 환경을 버텨야 했다. 이 회사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693억 원으로 전년 동기 영업이익인 7453억 원의 10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중견 가전 업체인 위니아전자는 지난해 9월부터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못할 만큼 경영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
국내 가전 회사들이 어려움을 겪는 주요한 이유로는 글로벌 가전 시장을 뒤덮은 수요 부진이 꼽힌다. 지난 하반기부터 세계시장 전반에서 일어나는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으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가전 시장에도 혹한기가 찾아온 것이다.
가전 업계는 올해에도 가전 시장 수요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 예로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글로벌 TV 시장 출하량이 1억 9900만 대로 지난해보다 1.4%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올 상반기까지는 혹한기가 지속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는 이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3 기자 간담회에서 “상반기는 굉장히 어려울 것이고 하반기부터는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동차 산업 역시 올해 전망이 불투명하다. 한국자동차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자동차 내수 규모는 전년 대비 0.5% 감소한 165만 대로 예상된다. 수출 역시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의 영향이 현실화되면 4.2%로 큰 폭의 감소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올해 국내 자동차 생산도 전년 대비 3%가량 줄어들 것으로 연구원은 내다봤다.
가전·자동차 등 전방 산업 부진으로 철강으로 대표되는 후방 산업의 생산도 줄어들고 있다. 가전과 자동차에 들어가는 도금강판을 만들던 포스코 광양제철소 도금강판 생산 라인이 폐쇄된 것도 궤를 같이한다. 포스코는 지난해 중국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중국 광둥성 차량용 강판 생산법인(광둥CGL) 지분을 중국 하북강철과 세운 합작법인에 매각하기도 했다.
이에 포스코의 국내 조강·제품 생산량도 계속 감소 추세다. 지난해 포스코의 조강, 제품 생산량은 각각 3421만 톤, 3227만 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 9% 감소했다. 지난해 태풍 힌남노에 따른 포항제철소 침수 피해가 있었지만 두 자릿수 생산 감소는 시장 수요 감소도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광양제철소의 경우 고로 쇳물 생산량이 최근 5만 톤 안팎으로 평년(6만 톤) 대비 1만 톤가량 줄어들며 생산량 조절도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실제 포스코홀딩스의 실적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포스코홀딩스는 지난해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각각 84조 8000억 원, 3조 6000억 원을 기록했다고 이날 밝혔다. 매출은 전년 대비 11%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46% 감소했다. 매출 증가는 포스코케미칼 등 계열사의 호실적 영향이 컸고 영업이익 급감은 포스코의 판매 부진과 냉천 범람에 따른 일회성 비용이 늘어난 탓이다. 올해 업황 침체 전망에 김학동 포스코 대표이사 부회장은 원가 절감, 수익성 강화, 유동성 확보 달성을 위해 25일부터 비상경영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기로 했다. 김 부회장은 “각자 해오던 업무를 제로베이스에서 재점검해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이를 통해 작은 비용이라도 절감해 철저한 손익 관리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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