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30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1세. 타스통신 등 러시아 매체들은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이날 모스크바 러시아중앙임상병원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소련의 ‘개혁·개방’을 이끌고 냉전 기간에 치열하게 대립하던 서방에 화해의 손길을 내민 냉전 종식의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는 그를 ‘소련 제국’의 해체를 재촉하고 결국 서방에 패권을 넘긴 ‘배신자’로 기록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고르바초프는 7년 남짓한 임기에 20세기 말 국제 질서를 다시 쓴 인물”이라고 논평했다.
‘최연소’ 서기장, 집권 직후 미·소 정상회담
1985년 3월 정치국원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콘스탄틴 체르넨코 당시 서기장이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후임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 70년 소련 역사에서 ‘최연소’ 서기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젊은 시절 공산당의 특혜를 받으며 엘리트코스만 밟아온 그가 당권을 쥐자마자 시행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공산당 개혁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라는 두 개의 축을 내세운 그는 인민위원직선제를 도입하는 등 전제주의적 사회주의 타파를 추진했다.
집권 첫해 ‘적의 수장’인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스위스 제네바에서 최초로 미소 정상회담을 연 것도 그의 개혁·개방 의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평소 군비 감축을 주장해온 고르바초프는 미국 정상과의 첫 만남에서 상호 중거리 핵무기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며 세간을 놀라게 했다. 1979년부터 9년 동안 소모전을 벌이던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을 끝낸 것도, 1989년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담판으로 냉전 종식을 선언한 것도 그가 한 일이다. 대국민 연설을 즐긴 고르바초프는 친숙한 이미지를 가져 ‘고르비(Gorb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베를린 장벽 붕괴 용인, 소련 붕괴 재촉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개혁으로 소련 내부의 ‘붕괴 동력’이 움트게 됐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민주화 시위가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을 휩쓸 때 이들 국가에 대한 무력 개입을 정당화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1989년 냉전 종식의 상징적 사건인 베를린 장벽 붕괴를 용인했다. 이는 이후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급격한 소련 이탈에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위성국가들은 소련의 통제에서 빠르게 벗어났고 이는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입지를 뒤흔들었다”고 평했다.
급진적인 개혁으로 사회적 혼란과 경제난도 뒤따랐다. 이에 반기를 든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등 온건 개혁파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감행해 고르바초프를 연금하는 일도 벌어졌다.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지만 큰 타격을 받은 고르바초프는 같은 해 공산당 서기장과 대통령에서 차례로 사임하며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1990년 그가 냉전 종식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 1년 뒤의 일이다.
푸틴과 껄끄러운 관계, 우크라 전쟁 비판도
고르바초프는 여러 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비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친서방 노선을 유지하며 공산당 독재를 피하려 했던 고르바초프와 달리 푸틴은 권위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며 서방과 패권을 다투고 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와 반년 넘게 벌여온 전쟁 역시 소련 재건을 목적으로 한 신냉전의 일환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가디언지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이뤄진 긴장 완화와 군비 감축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유혈 전쟁으로 대체됐다”고 지적했다. 고르바초프는 푸틴 집권 초기 그를 지지했지만 이후 푸틴이 독재적 성향을 드러내자 그에 대한 지지를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르바초프는 생전에 서방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푸틴의 측근은 전부 도둑”이라는 직설적인 언사로 푸틴을 비난한 바 있다. 거꾸로 푸틴은 소련 붕괴가 “20세기 최고의 지정학적 비극”이라며 고르바초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고르바초프의 유가족과 친구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전문을 보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