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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사랑'으로 나라를 바꿔보자는 '황당한 정당'이 실제로 있었다고? [지브러리]

"보드카를 맥주로 바꾸겠다"…술자리에서 시작된 맥주 애호가당

탈공산주의와 민주화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의회 16석 차지해

당의 분열 막지 못하고 해산…맥주 관련 산업 성장엔 성공적이었단 평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폴란드에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정당이 있었다. 공식 명칭은 ‘Polska Partia Przyjacioł Piwa’로 직역하면 ‘폴란드 맥주 친구 정당’이다. 말 그대로 폴란드의 맥주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모여 하는 파티에서 유래한 이 정당은 장난스러운 이름과 달리 의석을 16석이나 차지했던 영향력 있는 정당이었다.

시트콤에서 시작된 한 정당이 의회에 입성하기까지


비어 스카우트(Skauci Piwni)의 한 장면 / 사진=유튜브 Piotr Kusiak 캡쳐


1980년대 말, 폴란드 방송에서 보이스카우트 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맥주 내기를 하고 온갖 모험을 벌이는 ‘비어 스카우트(Skauci Piwni)’라는 시트콤이 방영됐다. 맥주를 마시며 시나리오 회의를 하던 제작진은 문득 “맥주 정당 같은 걸 만들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이 말을 전해 들은 폴란드 주간지 ‘Pan’의 편집장이었던 아담 할베르(Adam Halber)는 제법 괜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당시 폴란드 전체 술 소비량의 60%가 보드카였는데 도수 높은 보드카를 마시는 폴란드인은 알코올 중독과 숙취를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할베르는 보드카 대신 도수가 낮은 맥주를 더욱 대중화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생각했다. 반 쯤 장난으로 할베르는 ‘폴란드의 보드카 문화를 안전한 맥주로 바꾸겠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맥주 애호가당’이 정식 정당이 되기 위해선 5,000명의 당원이 필요했다. 당원을 모으고자 할베르는 ‘Pan’ 1990년 가을 호에 당의 소개와 당원 가입 카드를 실었다. 누가 관심을 가져줄까 싶었던 ‘맥주 애호가당’은 의외로 큰 호응을 얻었다. 수천명의 독자가 이름, 주소, 서명을 적은 당원 가입 카드를 편집부로 보내온 것이다. 마침내 1990년 12월 28일,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은 정식 정당이 됐다. 당 대표는 비어 스카우트의 출연자 ‘야누시 레빈스키(Janusz Rewinski)’가 맡고 할베르는 부대표로 실무를 담당했다.

탈공산주의와 민주화의 틈바구니에 자리 잡은 맥주 애호가당


정식 정당이 된 맥주 애호가당은 곧 시행될 총선에서 의회 입성을 목표로 정책을 준비했다. 이들은 맥주 문화 장려를 위한 정책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 중에서도 맛있는 맥주의 기본인 ‘깨끗한 물’과 관련된 환경법을 가장 중요시했다. 또한 보드카의 세금을 올리는 정책, 맥주 양조장과 술집의 개업 절차를 간소화하는 정책 등도 함께 마련했다. 당 대표인 레빈스키는 시트콤에 등장했을 때처럼 보이스카우트 옷을 입고 맥주를 마시며 당을 선전했다. 그 홍보 효과는 엄청났고 지지자는 물론 총선에 출마할 후보를 수백 명이나 모았다. 대부분은 그냥 이름이 웃겨서 모였지만 당시 혼란했던 정치 상황 속에서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이 나름의 대안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동유럽에는 탈공산주의와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다. 폴란드는 그 흐름을 선도한 나라였다. 1989년 폴란드 선거에서는 자유연대노조가 하원 의석을 휩쓸었고, 이듬해에는 노조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대통령이 됐다. 폴란드는 자유를 찾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상의 수준이 당장 서유럽만큼 좋아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하원 의석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던 자유연대노조가 수많은 정치집단으로 분열해 각기 다른 정당을 창당하면서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이 상태에서 1991년 10월 첫 번째로 폴란드 최초의 완벽한 자유 선거를 치르게 된 것이다.

당시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은 36만 7,106표를 얻어 16명의 의원을 배출해냈다. 물론 당시 투표율은 43,2%로 저조했고 최대 당인 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마저 득표율이 12%에 불과할 정도로 혼란이 가득한 선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맥주 애호가당의 의원석은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맨 뒤쪽 두 줄로 정해졌다. 이유는 맥주를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하니까!

맥주 애호가당이 가져온 ‘작지만 큰 변화’




외국에서도 비슷한 이름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등 맥주 애호가당은 그 자체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화려했던 겉모습과 달리 당 내부는 의회에 입성하자마자 분열됐다. 당은 당 대표 레빈스키를 필두로 ‘이젠 술에서 깨고 제대로 된 정당의 모습을 갖추자’는 ‘Big Beer(큰 맥주)’와 부대표 할베르를 필두로 ‘초심을 잃지 말고 맥주를 통해 세상을 보자’는 ‘Small Beer(작은 맥주)’로 갈라졌다. 치열한 분열 속에서 심지어 당을 최초로 설계했던 할베르마저 당적을 사회민주당으로 옮겨버렸다. 중추들이 다 빠진 당은 이어진 1993년 총선에서 겨우 0.1%의 표를 얻어 의회 재입성에 실패했고, 그다음 총선인 1997년 총선 이전에 결국 당은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폴란드의 맥주 애호가당은 약 7년이라는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하고 창당, 당원 모집, 정책 제시, 의회 입성 등 정당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또한 맥주라는 이슈를 대중화한 덕에 여러 변화도 생겼다. 맥주 애호가당의 의회 입성 이후 폴란드의 보드카 소비량은 60%에서 30%대로 크게 줄었다. 맥주 산업은 이후 꾸준히 발전해 폴란드는 현재 세계 맥주 생산량 10위권 안에 드는 국가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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