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불간섭’ 기조를 재확인하면서 탈레반은 새 정부 수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이 아프간에 예정된 특별인출권(SDR) 배정을 보류하는 등 국제사회가 돈줄을 속속 차단한 탓에 탈레반은 이미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했다. 샤리아법(이슬람 율법)을 앞세워 강압 통치를 예고한 탈레반이 아프간 국민을 쥐어짜는 ‘수탈 경제’의 길로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서는 아프간에 있는 자국민을 모두 대피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사실상 미국인들이 정치적 인질 신세로 전락했다는 지적마저 나왔다. 바이든 정부가 자국민 탈출을 위해 탈레반에 협조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탈레반, 민주주의 대신 샤리아법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탈레반은 과거 1996~2001년 아프간 집권 때와 유사한 평의회(Council) 중심 정치 체제를 구상하고 있다. 평의회 의장이 대통령 역할을 맡지만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인 히바툴라 아쿤드자다는 의장보다 서열이 더 높다. 통치 근거는 이슬람 샤리아법이다. 탈레반 고위 인사인 와히둘라 하시미는 “아프간은 샤리아법에 의해 통치될 것이며 이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국가를 운영할 자금이 태부족이다. IMF는 이날 아프간에 대한 4억 5,500만 달러 규모의 SDR 배정을 보류한다고 밝혔다. SDR은 IMF 회원국이 달러·유로·엔 등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통화를 인출할 수 있도록 한 권리다. 독일도 이날 아프간 개발 원조를 중단했으며 바이든 정부는 아프간 중앙은행의 자산을 전격 동결했다. 현재 아프간 중앙은행에 남아 있는 달러 외화는 2,000만 달러(약 235억 원)에 그친다는 증언도 나왔다.
국제 감시로 지하 경제도 침체…공포 조성
탈레반은 지난 2001년 9·11테러 이후 그간 아편 원료인 양귀비 수출이나 불법 의약품 밀매로 자금을 조달해왔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감시 탓에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 탈레반은 해외 원조를 염두에 두고 유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지만 탈레반 정권의 속성상 이런 기조가 지속되기는 어렵다. 실제 무장한 탈레반 대원들은 기습적으로 아프간 가정을 방문해 ‘신상 정보를 적고 출근하라’고 압박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또한 아프간 독립기념일을 맞은 19일(현지시간)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탈레반은 총격을 가했다. 러시아 스푸트니크통신에 따르면 동부 잘랄라바드에서 4명 이상, 쿤나르주에서는 3명이 사망했다. 전날 시위에서도 3명의 희생자가 나온 바 있다. 결국 탈레반의 빈 주머니를 채울 마지막 보루는 국민 수탈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인 탈레반에 아직 남아…‘볼모’ 신세"
아프간 철군 전략 실패로 수세에 몰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 “아프간에 남은 미국인 모두를 구출할 때까지 미군을 철수시키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프간의 미군 철군 시한을 당초 이달 말에서 연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미국인 구출에 대한 주도권은 이미 탈레반이 쥐고 있는 형국이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도 “미국인 구출에 필요한 군사적·정치적 수단이 충분하지 않다”며 사실상 탈레반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시인했다.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에서 “(미국인 생사여탈권을) 탈레반이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탈레반이 공식적으로 미국인을 인질로 잡지는 않았지만 바이든 정부는 탈레반의 ‘정치적 볼모’가 됐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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