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크게 악화한 한일관계로 일반인들에게조차 익숙해진 외교 용어가 있다. ‘초치(招致)’다. ‘불러서 오도록 한다’는 뜻으로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은 양국 국민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대사를 비롯해 상대국 외교관을 초치한다.
이수훈 전 주일 한국대사의 경우 지난해 10월30일 한국 대법원이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첫 배상 판결을 내린 이후 이달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5개월여 동안 외무성의 초치로 네 차례나 외무성에 들어가 항의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지난해 11월29일에는 한일 양국이 상대국 대사를 동시에 초치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 대법원이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미쓰비시중공업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자 외무성은 이 전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외교부는 일본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발언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를 청사로 불러들였다. 외교부의 전직 고위관계자는 “역사적인 문제가 많아 다른 국가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초치가 빈번하기는 하지만 요즘은 우려될 정도”라고 말했다.
한일 간 갈등의 골을 더 깊게 만드는 것은 위안부화해·치유재단 해산 공식화,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 과거사 문제뿐만이 아니다. 양국 고위관계자들의 감정적 대응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3월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관세에 한정하지 않고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라든지 여러 보복조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1월 올해 첫 시정연설에서 의도적으로 한국을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한국 측에서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3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왕 사과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일본을 발칵 뒤집었다.
양국 외교관계 악화의 유탄은 고스란히 경제인들에게 떨어지고 있다. 급기야 다음달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한일경제인회의’도 오는 9월 이후로 연기됐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한일관계가 아무리 어려울 때도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업의 특성상 경제인회의는 매년 빠짐없이 개최됐다”며 “그럼에도 회의가 무기한 연기된 것은 한일관계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지난해 기준으로 중국과 미국에 이은 3위의 교역 대상국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한일 간 교역 규모는 2015년 이후 연평균 6%씩 꾸준히 성장해왔다. 현재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390개사로 이들 기업이 창출한 일자리는 약 8만2,000개에 달한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정치적 문제로 촉발된 위기에 직격탄을 맞는 것은 경제계와 국민”이라며 “한일관계가 좋았을 때 우리 경제도 좋았다”고 언급한 이유다.
특히 부품과 소재· 장비에 대한 일본 수입 의존도가 높다는 점은 한일관계 악화에 따른 우리 경제의 위기 요인이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일본산 전자부품 수입액은 71억달러에 달하며 이 가운데 핵심소재도 대거 포함돼 있다. 박 교수는 “한일 간 경제단절로 이미 신규 투자는 없어지고 일본이 우리 대신 대만과 손잡는 움직임도 현실화했다”며 “더 심해지면 일본이 우리 취업비자를 제한하고 위생검사 강화, 무역보험 적용 제외 등을 활용해 우리 기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꼬집었다.
/정영현·박효정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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