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 네거리 부근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면 산이 마치 하얀 연꽃봉오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원래 백악산(白岳山)이라 불렀던 모양이나, 그 아래에 경복궁을 터잡아 짓고 난 뒤로는 서울의 진산(鎭山·터를 눌러 보호하는 명당의 뒷산)으로 북주(北主·북쪽의 주산)가 된다하여 북악산이라고도 부르게 됐다.…백악산은 시청 앞 근처의 큰길 쪽에서 마주 바라보면 봉우리 끝부분이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다. 그런데 이 ‘백악산’은 봉우리 끝이 곧게 솟아 있다. 겸재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을 터인데 사실 청와대 앞이나 삼청동 근처에서 백악산을 바라보면 실제 이와 같이 보인다. 겸재는 바로 이 산 및 서쪽 기슭인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나서 50대 초반까지 살았으니 백악산을 어느 방향에서인들 바라보지 않았겠으며 어떤 골짜기 어떤 바위인들 모를 리가 있었겠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백악산’을 손에 들고 서울 속 도심여행에 나선 기분이다. 겸재가 65세 무렵에 제작한 ‘한중기완첩’의 한 폭으로 그려넣은 이 작품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함께 나들이 나선 듯 조분조분 그림으로 지형을 설명해 주는 저자는 겸재 연구에 있어서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가헌 최완수. 1966년부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을 거쳐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으로 연구에 매진하는 ‘그림밖에 모르는 이’다. 그가 겸재의 한양 그림 중 72폭을 엄선해 그림의 내력과 서울이야기를 풀어썼다. 저자가 직접 그림 속 장소를 찾아가 옛 모습과 지금의 풍경을 교차시켜 보는 맛이 일품이다.
겸재는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일대인 북악산 서남쪽 기슭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리 국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전제 아래 흙산과 바위산이 적당히 어우러진 우리 국토의 아름다운 산천을 소재로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주역 원리에 따라 화면을 구성하는 독특한 고유 화법’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했다. 진경산수화로 크게 성공한 다음 겸재는 지금의 옥인동인 자수궁교 근처의 인왕곡으로 이사했다. 70세의 겸재가 그린 ‘인곡유거’는 바로 자신이 살던 집을 담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겸재의 작품으로는 단연 국보 제216호로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인왕제색’이 꼽힌다. 최근 일반에도 개방된 청와대 ‘칠궁’ 자리에서 인왕산 쪽을 바라보며 그린 비 갠 직후의 산세다. 그림 앞 오른쪽에 칠궁 중 육상궁의 뒷담을 그려넣어 지금도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백악산’도 ‘인왕제색’처럼 우람하고 위엄있는 산이 주인공이다. 겸재는 안동 김씨 가문의 김창흡 형제와 절친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의 근원지가 바로 백악산이었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들이 중심이 돼 우리 산천과 문화를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진경 문화’운동이 전개됐고 그 영향을 받은 겸재와 관아재 조영석 등은 이른바 ‘백악사단’이라 불렸다. 단순한 산이 아니라 사상적, 역사적 의미를 지닌 명산이었음을 그림을 통해 그 장엄한 검은 빛으로 이야기한다.
지난 2004년 동명의 책이 나온 적 있으나 지금은 절판됐고 그간 저자의 연구가 더해졌기에 이번 책으로 새롭게 출간됐다. 저자는 “250여년 전 진경시대의 그림 같은 한양 서울의 모습을 겸재 친필의 진경산수화로 현장을 확인하면서 해설을 읽고 오늘과 비교하면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소개했다. ‘수성동’ ‘세검정’ ‘필운대’ ‘압구정’ ‘동작진’ ‘송파진’ 등은 지명도 그대로여서 친근한 동시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책 말미에 서울 지도와 함께 겸재 그림의 실제 장소들을 일일이 표시해 둔 것은 직접 찾아가보길 청하는 저자의 배려다. 5만5,000원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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