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말도 마세요. 그랬다가는 ‘밖’에서 수십 통의 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시중은행장과 점심을 하면서 은행들이 국내 벤처를 육성하는 데 전폭적으로 앞장서야 하지 않겠느냐며 ‘나라를 생각하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은행이 1조원 정도 펀드를 만들어 신생 벤처투자에 나서라고 아이디어를 줬다. 혼자가 안 되면 여러 은행과 만들어 보라고도 했다.
은행이 미래 신성장인 벤처를 육성한다는 의미가 있고, 예대마진이 아닌 새로운 수익모델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우리나라 은행이 이제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에 수천억원을 수년간 투자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선진 은행으로 도약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채근의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손사래와 함께 “바깥의 전화가 겁난다”는 대답이었다. “농담하느냐”고 반문하자, 은행장 자신이 겪었던 경험까지 들려줬다.
자신도 최근에 벤처 투자건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윗선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에둘러 거부하느라 혼이 났다는 것이다. 윗선과 얼굴을 붉히기 직전까지 갔다는 말도 했다.
이 은행장은 그나마 강단이 있었던지 윗선의 ‘긍정 검토’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지만, 뒤끝은 개운하지 않았다. 그는 “안팎에서 전화가 오는 업체는 전부 기술이 그저 그런 곳이 대부분”이라며 “오죽했으면 (은행장인) 나한테까지 전화가 오게 하겠느냐”고 토로했다. 은행 내부에 벤처투자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의 안목이 예전과 달리 굉장히 성숙해 있는데, 이들이 ‘거절’할 정도면 보나 마나 한 기업이라는 것이다. 수백조원의 자금을 가진 은행이 작은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데도 사방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기까지 했다.
이뿐 아니라 어떤 은행지주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청탁 없는 인사’를 외칠 정도로 우리 은행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당시 청와대로부터 승진인사 외압을 ‘3개월’이나 버틴 어느 지주 회장의 일화는 오히려 영웅담으로 전해질 정도다.
은행지주 회장이나 시중은행장 교체시기 하마평도 경영자질이 아니라 정치권이나 특정 권력자와의 학맥·인맥이 부각될 정도다. 이 때문에 우리 금융은 늘 ‘정치금융’이라는 그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한 지주 회장은 사석에서 “나와 관련한 루머가 들리면 속으로 ‘아, 임기가 1년 정도 남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며 허약한 거버넌스의 민낯도 고스란히 드러나곤 한다. 자산 30조원 규모의 수협은행은 행추위를 수차례 열었지만, 내부인사냐, 외부인사냐를 놓고 수개월째 줄다리기만 하느라 후임을 뽑지 못하고 있다. 우리보다 못한 후진국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최근 서울경제신문 주최로 열린 서경 금융전략포럼에 참석해 “우리나라 금융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평생 금융인으로 산 저로서는 자존심 상하고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했다. 말수 적고 점잖기로 소문난 임 위원장이 우리나라의 후진적인 금융에 답답한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마침 임 위원장이 직설 발언을 할 당시 2번 헤드테이블에는 국내 1호 인터넷은행인 케이뱅크의 심성훈 은행장이 정통 뱅커출신의 은행장들과 자리를 나란히 했다. 다른 은행장들은 여수신은 물론 지역 영업점 근무, 전략기획 등을 두루 거친 뱅커였지만, 심 대표는 뱅커와 전혀 관련 없는 정보기술(IT)업체인 KT에 입사해 줄곧 근무하다 케이뱅크 은행장을 맡고 있다. IT에 능숙한 사람이 오히려 은행장에 제격인 시대가 눈앞의 현실이 된 것이다. 시중 은행장들은 이날 헤드테이블에서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한 명이라도 자극과 위기감을 느꼈다면 다행이겠다.
/what@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