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위가 붙은 한벌짜리 작업복(점프수트)과 머리에 착 붙는 빨간 모자(비니), 그리고 코끝에 살짝 걸친 안경은 안상수(65·사진)의 트레이드 마크다. 분명하면서도 한결같은 그의 옷차림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멀리서도 그를 알아본다. 문자가 일관성 있는 사회적 ‘약속’으로 통용되듯 그 역시 스스로의 외양을 디자인한 셈이다. 그는 1985년 발표한 ‘안상수체’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전까지 한글은 한자와 엄연히 다른 원리·형태를 지녔음에도 한자에 기반한 ‘네모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터였다. ‘안상수체’는 네모 틀을 깨고 한글을 해방시켜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킨 첫 시도로 꼽힌다.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최효준) 서소문본관 1층에서 시각디자이너 안상수의 작품관과 그가 설립한 대안적 디자인학교인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이하 파티)의 활동을 조명한 SeMA 그린 ‘날개.파티’전이 5월 14일까지 이어진다. 세마 그린은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작가를 선정, 그 업적과 자취를 되짚는 격년제 전시로 김구림·윤석남에 이은 안상수가 세 번째 작가이며 디자이너로는 처음이다.
관객을 맞는 포스터부터 남다르다. 웃는 얼굴 이모티콘처럼 보이는 ‘ㅅㅇㅅ’은 안상수 이름의 초성 ‘ㅇㅅㅅ’을 배열한 것. 작품으로는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그린 대형 문자도 ‘홀려라’가 눈길을 끈다. 작가는 “몰입을 뜻하는 순우리말 ‘홀려라’인데, 홀리면 그 대상이 꿈에서든 밥 먹을 때든 떠오른다”며 “연애도 홀려서 하듯 이러한 몰입이 창작자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라고 말했다. 지난 1998년부터 작가 금누리와 공동발간해 총 17호까지 내놓은 독립잡지 ‘보고서/보고서’를 뒤적이는 것도 흥미롭다. 2007년 작업한 ’라이프치히 문자 드로잉’은 순수미술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운치를 갖는다. 민화 ‘문자도’의 현대적 작품이라 볼 만하다.
안상수의 손에서 ‘읽는 문자’는 ‘오감으로 느끼는 글자’로 다시 태어난다. 소통과 정보 전달 매체인 문자의 속성을 해체한 뒤 조형성을 중심에 두고 감수성과 새로운 질서를 덧입힌 결과다. 한글 24자의 소리 요소를 도자기로 만들어 악보처럼 배열한 작품은 가지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글꼴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벽면 드로잉, 설치작업, 문자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으로 실험한 한글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안상수는 안상수체 외에도 이상체, 미르체, 마노체 등 다양한 한글 글꼴을 만들었고 2007년 구텐베르크상을 수상했다.
한편 홍익대 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던 안상수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2012년 ‘파티’를 세웠다.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돼 독일 디자인 철학의 근간을 이룬 ‘바우하우스’처럼 파티는 기존 교육정책의 틀 속에서는 구현되기 어려운, 삶과 밀착된 디자인 교육을 실천하는 독립 대안학교이자 교육 협동조합이다. 작가는 “컴퓨터공학의 기본이 수학인 것처럼 글자(타이포그래피)는 디자인의 핵심이자 기초인 만큼 글자를 부려서 디자인하는 타이포그래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바우하우스처럼 역사적인 콘텐츠를 남길 수 있는 학교로 ‘파티’를 디자인하고 싶다”고 밝혔다. 파티는 올해 처음으로 졸업생 14명을 배출했다. 전체 재학생은 100명이 채 안되는 작은 학교이며 안상수는 교장 대신 그의 호(號)인 ‘날개’라 불리고 그는 학생들을 ‘배우미’라 부른다. 전시장 내 마련된 ‘교실’에서는 파티 커리큘럼에서 선별한 6가지 관객 참여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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