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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모아 태산

[식담객 신씨의 밥상] 스물다섯번째 이야기-잡채





1991년 늦은 가을, 어느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친구네 집 벨을 누르자, 어머니께서 반갑게 문을 열어 주십니다.

“어서 와라, 대두야. 밥은 먹었냐?”

나는 고등학교 1학년 하숙생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집을 떠나 시작한 하숙생활.

두어 달이 지나자, 그럭저럭 익숙해졌습니다.

40대 초반이던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한 성품에 음식도 맛깔스레 만드셨습니다.

덕분에 대체로 지내기 편했습니다.

단 하나 부담스러운 건 주말이었습니다.

다른 하숙생들은 토요일 오후면 모두 집으로 향했지만, 난 아버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하숙집에 머물렀습니다.

홀로 남은 내게 밥을 차려 주시느라, 주인 아주머니는 휴일도 없이 일하시는 듯 보였습니다.

그게 미안했습니다.

그날 점심, 라면을 끓여주시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상기돼 보였습니다.

몸살이 찾아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머물다간 아주머니가 저녁까지 차리실 듯했습니다.

“아주머니, 저 오늘 집에 가요. 얼른 나으세요.”

아주머니 얼굴에 안도감이 비치는 듯 느껴졌습니다.

하숙집을 나섰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전자오락실에 들어가 ‘스트리트 파이터 2’와 ‘아랑전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습니다.

배는 고프고, 지갑은 날씬하고, 집에 가기는 싫고, 하숙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찾아간 곳이 대우네 집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만난 친구 대우는, 영민한 머리에, 성격도 쾌활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땐 집이 가까워 자주 놀러 가곤 했습니다.

덕분에 대우 어머님께서 나를 기억하셨고, 우리 집 형편도 어느 정도 알고 계셨습니다.

“밥 안 먹었지? 배고프겠다.”

연락도 없이 오랜만에 찾아간 내게, 대우는 이유도 묻지 않고 어머니와 같은 질문을 건넵니다.

“아냐, 먹었어.”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간 것만 해도 미안한데, 밥까지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년만화잡지 ‘IQ 점프’를 뒤적대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쟁반에 음식을 내오십니다.

잡채와 전입니다.

“이거 먹고들 놀아라. 너희 때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법이다.”

잡채가 참 맛있습니다.

살짝이 달콤한 짭짤한 볶은 당면과 채소는, 밥 없이도 짜지 않게 배를 채워줍니다.

쫄깃하게 씹히는 고기 채와 느타리버섯의 맛과 향은, 춥고 허기진 나를 금세 따스한 행복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밥 먹었다더니 엄청나게 잘 먹네. 더 갖다 줘?”

“아, 응? 그래....”



손이 큰 대우는 어머니께서 가져다주신 것만큼 잡채를 더 퍼옵니다.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납니다.

원래 말을 오래 하면 허기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대우야, 먹을 것 좀 있느냐?”

대우는 부엌에서 잡채를 솥째로 가져옵니다.

“졸려서 안 되겠다. 나 잘 테니까, 너 먹을 만큼 먹고 뚜껑만 잘 닫아둬.”

오랜만에 맛보는 하숙집 밖 음식.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담긴 음식에,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습니다.

갑자기 떠오르는 우리 엄마 모습을, 황급히 고개를 지우려 합니다.

이미 본 만화책을 다시 뒤적대다가, 잡채를 뜨고 또 뜹니다.

“대두야, 일어나.”

“어, 벌써 해 떴어?”

“얼른 밥 먹자.”

밥상에 앉자 지난밤 먹었던 잡채의 여운이 찾아옵니다.

“혹시 잡채 남았느냐?”

“다 먹었어. 네가.”

대우가 피식 웃으며 대답합니다.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 제사였거든. 그래서 어제 전이랑 잡채랑 한 건데, 한 접시 한 접시 먹다보니 거의 바닥까지 갔더라구.”

“그걸 내가 다?”

“응, 네가 티끌을 모아 태산을 먹어치웠어.”

“정말? 아,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냐? 그래서 제사는?”

“잡채 없이 지냈지 뭐. 괜찮아. 어차피 네가 다 먹을 거였잖아.”

미안하지 말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친구의 마음에, 내 가슴엔 죄책감과 고마움이 뒤섞여 일렁입니다.

설거지하시는 대우 어머니께 용서를 빕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됐네요~”

하숙집으로 돌아가려고 대우네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말씀을 건네십니다.

“대두야, 앞으로도 잡채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놀러 와라. 대우 없을 때도 괜찮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옵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우리 엄마 얼굴이 자꾸 떠오릅니다.

을씨년스런 열일곱이 저물어 갑니다.



*당면(唐麵: 당나라 당, 국수 면)은 문자를 풀이라면 ‘당나라 국수’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당나라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고, 중국에서 전래했단 의미로 당(唐)자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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