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특히 고액권 화폐에 들어가는 도안은 그 나라의 가장 상징적인 것이 들어간다. 미국 달러화에는 국회의사당, 의회 등 주로 건물이, 영국은 인물과 관련된 삽화가, 캐나다는 물총새, 흰 올빼미 등 새 도안이 그려져 있다. 이웃나라인 일본은 엔화에 길조로 생각하는 학이나 꿩 등을 넣다가 후지산 벚꽃과 봉황상을 넣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까. 한국은행은 지난 5월18일에 새 1만원권 지폐를 공개했다. 내년부터 사용할 새 1만원권 지폐의 인물초상은 세종대왕으로 전과 같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과학유물이 지폐 도안으로 채택된 것.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내용이다. 1만원권 뒷면은 조선의 대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바탕무늬로 들어갔고, 혼천시계의 일부로서 당대의 우주관을 보여주는 혼천의, 국내 최대규모의 보현산 천문대 광학천체망원경이 소재가 됐다. 국보 228호와 230호로 지정된 천상열차분야지도와 혼천시계가 화폐 도안에 등장하게 된 이유는 이들이 문화적으로 지닌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뜻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395년 조선 태조 때 고구려 천문도를 기본 자료로 사용해 만든 천문도다. 과학적 목적으로만 만든 것은 아니다. 건국 초기 어지러운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대 과학의 역할은 오늘날의 과학의 역할과는 또 다른 면이다. 혼천시계와 혼천의도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무너진 왕실의 체통을 살리고 옛 제도를 복구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많은 노력을 했다. 옛날의 천문학은 임금의 고유한 권한이자 의무였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 사회를 안정시키자면 천문학을 정비해야 했던 것이다.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을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천체 관측 기구도 정비하였다. 혼천시계는 이러한 상황에서 개발된 과학 기술이다. 조선 현종 1669년에 송이영은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기계식 추시계를 보고 그 원리를 터득해 혼천시계를 만들어냈다. 똑딱똑딱 추시계가 움직이면서 매 시간마다 시간판이 돌아가고 인형이 종을 치도록 고안됐다. 태엽과 건전지가 없던 시절이기에 시계의 동력은 무거운 추가 서서히 내려오는 힘을 이용하였다. 혼천시계의 놀라운 점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서양의 추시계가 발명된 지 겨우 십여 년 만에 머나먼 조선에서 정교한 장치를 구현해 냈다는 점이다. 그런데 혼천시계가 가지는 더 놀라운 사실은 당시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독특한 발상이 들어가 있다는 점. 시계의 작동에 맞물려 혼천의의 고리들이 회전하고, 지구의(즉 지구본)가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종의 시뮬레이터를 만들었다. ‘혼천의’라 부르는 바로 이 부분이 당시의 우주관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혼천의에는 지구를 감싸고 있는 고리가 2개가 있는데, 각각 천구의 적도와 황도를 나타낸다. 원래 혼천의는 이 고리들을 회전시키면서 천체의 적도 좌표, 황도 좌표, 지평좌표계를 측정할 수 있는 관측 장비다. 하지만 혼천시계에서는 이를 단순화해 누구나 쉽게 대충이나마 우주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제작됐다. 혼천시계에는 톱니바퀴로 동력을 전달하는 기술과 세계지도가 새겨진 지구의 등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계와 우주 모형의 작동을 연결시킨 발상은 세종시대의 자격루나 옥루라는 물시계들로부터 송나라와 원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아시아 문명의 전통이 반영된 것이다. 동서양 기술과 문화의 컨버전스로 태어난 우리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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