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지난 4월25일에 열린 '서경 금융전략포럼' 주제강연에서 "수많은 창조적 아이디어들이 넘지 못한 게 바로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철학인) 창조경제와 그 바탕을 이루는 창조금융의 역할은 바로 이 계곡에 물(자금)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가 22일 내놓은 '성장사다리펀드'의 임무가 바로 '죽음의 계곡'에 물을 채우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벤처 거품이 꺼진 후 엔젤과 벤처투자가 급감해 성공하는 창업기업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데 따른 보완책이다. 시기별로 창업기업에 돈이 필요한 때를 3단계로 나눠 투자하겠다는 게 당국의 의도다.
◇맞춤형 3단계 투자지원책=성장사다리펀드는 기본적으로 '펀드 오브 펀드' 형태다. 가장 위에 성장사다리펀드가 있고 그 밑에 창업금융ㆍ성장금융ㆍ회수금융 등 세 가지로 목적을 달리하는 아들 펀드가 있다. 그 아래 부문별로 창업에는 ▦스타트업 ▦엔젤매칭 ▦크라우드매칭 ▦초기자산인수펀드가 들어가고 성장에는 ▦지식재산 ▦구조화금융 ▦M&A지원 ▦그로스캐피탈펀드를 만들 계획이다. 회수에는 ▦세컨더리 ▦코넥스 ▦재기지원펀드 등이 생긴다.
이런 구분은 기업이 창업 후 세 번의 자금난이 온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죽음의 계곡'이 세 번 찾아오는데 그 시기별로 맞춤형 지원을 하겠다는 의미다. 금융위의 한 관계자는 "창업 2~3년째에 창업자금이 소진되는 가운데 연구개발(R&D) 같은 자금수요가 확대돼 자금난에 직면하고 5~6년째는 엔젤자금이 소진된 상태에서 사업화자금이 부족하게 된다"며 "9~10년차에 들어가면 본격적인 성장ㆍ사업확장에 따른 필요자금 규모가 크게 생긴다"고 설명했다.
성장사다리펀드는 1년차에 2조원 규모로 조성된다. 정책금융공사와 산업은행ㆍ기업은행 등은 1년차에 6,000억원을 조성, 모펀드와 자펀드에 투자한다. 국민연금 같은 연기금과 민간 투자자들이 나머지를 댄다. 기본적으로 정책금융기관은 후순위로 들어가 민간 투자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방침이다. 펀드는 3년간 총 6조원 규모로 커지며 정책금융기관이 1조8,500억원을 댈 예정이다.
◇엔젤투자 급감 등 창업지원 크게 부족=정부가 이처럼 창업ㆍ벤처기업에 대규모 펀드를 만들어 지원하기로 한 것은 최근 새싹기업에 대한 투자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자리와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창업기업과 여기에서 커나가는 업체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초기에 자금난으로 문을 닫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금융위에 따르면 창업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엔젤투자 규모는 2000년 5,493억원에 달했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 2011년에는 296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중소기업 자금조달 금액의 99%는 금융권 대출로 투자는 5조원 수준에 불과하다. 투자 형태도 보통주보다는 이자부담이 발생하고 상환권이 달린 전환사채와 상환우선주가 늘고 있고 인수합병(M&A)을 통한 자금회수 규모는 극히 미미해 국책금융기관 주도의 투자펀드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게 금융위의 설명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기존의 창업투자조합이나 벤처투자조합에서 투자가 미진한 성장ㆍ회수단계에 대한 지원과 지식재산권 등에 자금지원을 하려고 하는 게 성장사다리펀드"라며 "창업ㆍ혁신기업을 중심으로 충분한 자금을 공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대전에서 열린 간담회에서도 창업ㆍ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지금도 창업 초기 지원은 많지만 기술검증이 끝나고 샘플 제작에 들어가면 투자하려는 곳이 없고 금융권에서는 매출이 없으면 투자를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종갑 벤처캐피탈협회장은 "은행이나 증권ㆍ보험사에서 벤처투자를 더 해줬으면 한다"며 "정부도 금융사에서 벤처기업에 투자할 때 세금혜택을 주거나 회계처리시 혜택을 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제2 벤처 거품 되나 우려도=금융권에서는 정부의 벤처ㆍ창업기업 지원방향에는 큰 틀에서 공감하면서도 '제2의 벤처 거품'이 재연될 수 있다며 걱정하고 있다. 정권 차원에서 창조금융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악용해 기업들이 '묻지마' 식으로 자금지원만 받을 경우 부실만 크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 때도 벤처기업 지원을 대폭 늘렸다가 부실만 생긴 적이 있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제대로 된 기업을 선정, 지원하는 것이 중요한데 기업평가 등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지금도 벤처지원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성장사다리펀드의 경우 정부가 조성여건만 만들고 무한책임사원(GP)을 선정해 실제 운영은 민간에 맡기는 구조다.
일각에서는 정책금융기관이 후순위로 들어가면서 민간 투자자들의 투자에 따른 안전성을 지나치게 보장해주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3년 기준으로 1조8,500억원 중 5,000억원만 후순위로 들어가는 것이고 후순위는 수익배분시 더 받을 수 있다"며 "투자환경 조성이 워낙 안 되고 있기 때문에 정책금융기관이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