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일본의 ‘군칸지마’, 즉 ‘하시마’라는 섬을 유네스코 기념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던 시도에 제동이 걸린 적이 있습니다. 해당 섬이 과거 한국과 중국 출신 징용자들의 강제 노동에 의해 떠받쳐지던 노역장이라는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일본은 해당 지역을 ‘메이지 산업 혁명 기념 사적’으로 국제 기구에 등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20세기 초중반 일본의 산업화를 지탱한 인적 자원은 아시아 각 식민지 출신 노동자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 외교 당국이 문제를 제기하고, 일본 정부와의 지속적인 협의 끝에 강제 노역 사실을 설명하는 주석이 달려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됐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취한 이후의 행동이 기가 막힙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인 포로로서 군칸지마에서 일했던 제임스 머피(94) 씨에게 사과하겠다고 공식 성명을 내놓은 것입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한국, 중국 노동자들에게 사과할 일정은 아직까지 전무한 상태로 말입니다.
얼마 전 ‘집단적 자위권’ 중의원 가결로 군사적 보통국가가 될 명분을 확보한 아베 정권은 ‘아베 담화’를 내놓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1993년 고노 전 중의원 의장이 관방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미야자와 내각을 대표해 내놓은 ‘고노 담화’를 본딴 성명입니다. 고노 담화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 인정, 식민 통치의 오류 등을 인정한 이후 사회당 정부의 무라야마 담화 등이 이어졌습니다. 몇몇 양심적인 일본 정치인들은 직간접적으로 36년 식민 통치 과정에서 빚어졌던 과오와 인권 침탈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직접 총리대신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물의를 빚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전후 60주년 기념으로 ‘고이즈미 담화’를 내놓았고, 이번에는 ‘70주년 기념’으로 아베 담화를 내놓는답니다.
그러나 사과의 내용과 취지를 살펴보면 기가 막혀 실소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식민 통치 과정에서 빚어진 온갖 인권 침탈과 자산 반출에 대해서는 공식 사과가 없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군사적 위력을 활용해 주변 국가를 침략한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유감 성명이 있을 것 같다고 전문가들은 전망합니다. 특히 최근 집단적 자위권으로 인해 일본 정부 안에서는 ‘우리도 군사적 보통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합니다. 대내외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정권 지지율과는 별개로 말이죠. 스스로의 성과를 ‘홍보’해야 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다르지 않은지 아베 정권은 독특한 포맷의 ‘사과’ 발표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국격에 걸맞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창출하겠다는 일념을 표현하듯 말이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사과란 무엇인가와 관련해 체득한 바 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과는 요식행위일 뿐입니다. 마음을 담은 사과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해 온전히 과오를 인정하고 상대방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콘텐츠를 전달해야 합니다. 이미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공유되어 있기에, ‘정보’ 기반의 사과보다는 ‘감정’ 기반의 사과가 더욱 절실합니다. 보통 잘못한 사람은 미안하다고 마음을 표현하기 전에 상대방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서둘러 ‘아베 담화’를 발표하고, 정작 최대의 피해자인 한국은 ‘나 몰라라’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눈치 보기란 찾을 수 없습니다. 하다 하다 못해 일본은 한국에 ‘쿨’해지기까지 강요하는 것일까요. 어째 우리가 ‘언제 사과하나’하고 일본의 눈치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iluvny23@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