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휴전안 정리와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 사태가 일단락되자 트럼프 대통령이 그간 미뤘던 우크라이나 종전안을 재차 밀어붙이고 나섰다. ‘부패 스캔들’에 휩싸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자국에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를 빌미로 이른바 ‘평화 협정’ 체결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우크라이나 종전 기대가 고조되면서 국제 유가도 일시적으로 하락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종전안 기본 골격이 러시아가 작성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우크라이나에 불리하게 구성된 점은 변수다. 종전안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여론이 매우 좋지 않은 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또한 유리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 최대한 버티겠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협상 과정에서 배제된 유럽 국가들의 불만도 여전하다. 걸림돌이 산적한 상태에서 연내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무리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이 어떻게 진척되느냐에 따라 글로벌 증시와 유가도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관측된다.
트럼프, 가자지구 평화구상 직후 우크라 종전안 지시…러시아와만 상의
24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중순 가자지구 휴전을 이끈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 특사에게 우크라이나 전쟁도 종식할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쿠슈너와 위트코프 특사는 이에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키릴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특사와 접촉했고, 이를 토대로 종전안 초안을 작성했다. 이들은 지난달 24~26일 3일 동안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위트코프 특사 자택에서 드미트리예프 특사와 초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드미트리예프 특사는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불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의 러시아 점유, 우크라이나군 병력 축소 등의 아이디어를 냈다.
이후 쿠슈너와 위트코프 특사는 마이애미에서 루스템 우메로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서기와도 비공개로 만나 초안에 대해 설명했다. 우메로프 서기는 러시아에 더 좋은 협상이라고 불만을 드러냈고,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초안에 대해 보고를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초안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기 이틀 전인 이달 16일에야 종전안 28개 세부 항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22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국무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등 외교·안보 라인의 고위 관계자들과 키스 켈로그 우크라이나 특사 가운데 누구도 이 과정을 공유받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들과 러시아 관계자만 비밀리에 만나 종전안을 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갑작스러운 침공 이후 4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진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유세 과정 때부터 “내가 집권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24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수 차례 호언 장담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급한 트럼프 대통령은 8월 15일 미국 알래스카에서 푸틴 대통령과 6년 만에 정상회담도 가졌다. 같은 달 18일에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유럽 정상들을 워싱턴DC 백악관에 불러 모은 뒤 푸틴 대통령과 즉석 통화를 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상이 2주 안에 만나는 데 합의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외려 트럼프 대통령 덕분에 국제 제재를 뚫고 화려하게 국제 사회에 복귀한 푸틴 대통령은 9월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시진핑 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끈끈한 연대 관계만 뽐냈다. 러시아는 그 뒤에도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대적인 공습을 쉬지 않았고 점령 영토를 계속 늘려 갔다. 양자 회담에서 담판을 짓자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요구는 갖은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사실상 종신 지도자인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 임기제인 데다 국내 정치적 입지도 불확실한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의 말에 쉽기 휘둘릴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초안엔 돈바스·크림반도에 남부 영토까지 러시아에…“27일까지 합의하라”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종전 재추진 사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초안 내용을 알게 된 지 이틀 뒤부터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WSJ는 지난 18일 댄 드리스컬 미국 육군장관이 육군 4성 장군 두 명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찾아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동한다고 전했다. 미국 온라인매체 악시오스도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평화체제 △안전보장 △유럽 안보 △미국과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미래 관계 구상 등 4개 범주, 총 28개 항목의 평화 구상을 러시아와 비밀리에 논의하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러시아의 입장이 진정으로 반영되고 있다고 느낀다”는 드미트리예프 특사의 발언도 함께 내보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일 우크라이나의 대폭적인 양보를 요구하는 내용이 종전안에 담겼다고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초안에는 우크라이나군 통제 아래에 있는 영토까지 포함한 돈바스 나머지 부분까지 러시아에 양보하는 안이 들어갔다. 우크라이나가 군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는 방안도 있다. 또 우크라이나가 핵심 무기류를 포기하고 미국이 군사 지원을 축소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심지어 러시아어를 우크라이나의 공식 언어로 인정하고 러시아 정교회의 우크라이나 지부에 공식 지위를 부여하는 요구안도 넣었다. FT는 위트코프 특사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이들 조건을 수용하기를 바란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고도 덧붙였다. 이들 보도만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만 종전안을 상의하고 우크라이나에는 일방적으로 통보만 한 셈이다. 이에 앵거스 킹(무소속·메인)과 마이크 라운즈(공화·사우스다코타) 연방 상원의원은 22일 “작성 주체가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일에는 악시오스가 종전안 초안을 입수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나토 방식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이는 몇 달 전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가 처음 있을 때에도 거론됐던 방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8월 18일 백악관에 젤렌스키 대통령과 유럽 정상들을 모은 자리에서도 나토 조약 모델을 제시해 동의를 얻은 바 있다. 나토 조약 5조는 회원국 중 한 곳이 공격을 받으면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대응하는 집단방위 조항이다. 악시오스는 이어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 전체를 확보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차단한다는 내용도 초안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서명란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유럽연합(EU), 나토가 명시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안을 들고 미국의 추수감사절 연휴인 27일까지 합의하라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21일 트럼프 대통령은 폭스뉴스 라디오 인터뷰에서 “27일 목요일이 적절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CNN은 같은 날 트럼프 행정부가 올 연말까지 합의를 기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종전안 초안 28개 항목 안에는 전투 중단, 전후 재건을 위한 국제 자금 조달, 트럼프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 평화위원회 설치 등 가자지구 휴전 협상안과 유사한 내용들이 담겼다고도 소개했다. 돈바스뿐 아니라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자포리자 지역까지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내용도 있다. 21일 로이터통신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과 정보 공유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하며 종전안 수용을 압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우크라 종전안 일부 수정…영토는 트럼프·젤렌스키 합의 사항으로 남겨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안을 빠르게 관철시키려 하자 미국과 우크라이나, 유럽 대표단은 23일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세부 논의를 진행하고 ‘평화 프레임워크(틀)’를 마련했다는 공동 성명을 냈다. 미국에서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위트코프 특사, 쿠슈너, 드리스컬 장관 등이 참석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안드리 예르마크 대통령 비서실장이 참여했다.
루비오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계획의 핵심 사항을 좁히려 했고 그 목표를 달성했다”면서도 “EU, 나토의 역할, 우크라이나 안전 보장과 관련된 몇 가지 미해결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가능한 한 빨리 이뤄져야 하고 27일에 되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예르마크 비서실장도 브리핑에서 “최종 결정은 미국과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몫”이라고 말했다.
24일 WSJ는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기존 종전안의 28개 항목을 19개 항목으로 줄였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군 제한 규모를 기존 60만 명에서 80만 명으로 늘리고, 나토의 추가 확장 제한 관련 표현도 완화했다는 것이다. 영토 문제, 나토와의 관계 같은 부분은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결정하도록 미완으로 남겼다. 영국 가디언도 우크라이나가 기존 종전안에 상당한 수정을 가해 러시아의 요구사항 일부를 걷어냈다고 전했다.
같은 날 ABC는 미국 정부 관계자가 러시아와도 별도로 만날 계획이라고 알렸다. 종전안이 수정될 경우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까닭이다. WSJ는 “미국의 계획이 우크라이나의 우려를 완화할수록 러시아가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점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의식한 듯 우크라이나를 재차 압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리고 “우크라이나의 리더십은 우리의 노력에 고마움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고 유럽은 계속해서 러시아의 원유를 사고 있다”고 꼬집었다. 25일에는 백악관에서 “나는 우리가 합의에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신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텔레그램 메시지에서 “미국 대표단과 대화가 진행 중이고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신호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에너지 부패 스캔들’ 젤렌스키, 자국 입지 ‘흔들’…“美 제안 받으면 정치적 자살”
주요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안을 다시 한 번 꺼낸 것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자국 내 입지 약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21일 미국 정치 매체 폴리티코를 통해 “우크라이나인들은 (합의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현재 입장이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젤렌스키 대통령은 자신과 측근들의 에너지기업 비리 사건에 연루되면서 정치적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AFP·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달 11일 젤우크라이나 국가반부패국(NABU)과 반부패특별검사실(SAPO)은 대통령과의 친분을 앞세워 에너지 분야에서 불법으로 자금을 축적한 혐의로 렌스키 대통령의 전 사업 동반자인 티무르 민디치 등 7명을 입건하고, 이 가운데 5명은 구속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코미디언 시절 설립한 미디어 제작사 크바르탈95을 공동으로 소유한 사업가다.
수사 대상에는 전 에너지부 장관이었던 헤르만 갈루셴코 법무장관, 우크라이나 원자력공사 에네르고아톰의 고위 간부 등도 포함됐다. 이들은 정부 계약금 가운데 10% 이상을 뒷돈으로 받아 1억 달러(약 1400억 원)가량의 자금을 세탁한 혐의를 받는다. NABU에 따르면 민디치는 수사를 피해 해외로 도피하기까지 했다. 스비틀라나 흐린추크 에너지부 장관은 해임 통보를 받고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3일 대통령령으로 민디치의 자산 동결과 3년간의 경제 제재를 부과했다. 자신과의 연루 가능성을 차단하고 나선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5일 X를 통해 “에너지 부분 주요 국영기업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재무 활동을 전면적으로 감사하고 이들의 경영 활동을 쇄신할 것”이라며 민심 수습에 나섰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바람과 달리 정권에 대한 우크라이나 여론은 크게 악화됐다. 국민들은 러시아의 공격으로 심각한 에너지난을 겪고 있는데 지도층은 자기들 배를 불린 게 아니냐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세멘 크리보노스 NABU 국장도 “민디치가 누군가에게 (도피하라고) 경고받았는지도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18일 WSJ는 이번 수사가 2019년 젤렌스키 대통령 취임 이후 어떤 사건보다도 우크라이나 권력 상층부에 접근했고 대통령 본인에게도 가까이 다가왔다고 평가했다. WSJ는 "이번 비리는 전쟁을 견딘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을 가장 강력하게 위협하는 사건으로 부상했다"고 설명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국제사회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다. 폴란드 국영 PAP통신에 따르면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14일 “이런 사실들이 드러나면 우크라이나와 연대해 달라고 설득하는 게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폴리티코는 21일 “유럽과 우크라이나의 지원국들은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국민을 설득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느긋하고 도도한 러시아…“핵심 사항 빼면 상황 달라질 것”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요 외신들은 미국과 각국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믿고 종전안을 추진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드미트로 쿨레바 전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23일 WSJ를 통해 “국민이 원하지 않는데 단지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용납할 수도 없고 극도로 고통스럽기만 한 계획에 동의할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며 “국민이 거부하는 합의를 수용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을 의미한다”고 꼬집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21일 텔레그램 영상 성명에서 “존엄성을 잃거나, 핵심 동맹국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거나, 어려운 조항 28개를 받아들이거나,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음이 급해 보이는 우크라이나나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꽤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리아노보스티·타스통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7일 브리핑에서 “조건이 맞춰지는 대로 미러 정상회담이 열리기를 바란다”고 했다가 20일에는 “접촉은 유지하고 있지만 협의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은 없다”고 거리를 뒀다. 러시아가 원하는 ‘조건’을 다 받아들여야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줄 수 있다는 입장을 시사한 것이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21일에도 “우리는 (종전안의) 수정 가능성과 승인된 문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어떤 것도 공식적으로 받지 않았다”며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수정안을 낸 직후인 24일 역시 “우리는 아직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20일 아예 군복까지 차려 입고 러시아군 서부군의 지휘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군 간부들에게 “특별군사작전의 목표를 무조건 달성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지도층을 향해 “그들은 더는 정치적 지도부가 아니다”라며 “지난해 3월부터 러시아와 전쟁을 계속 해야 한다는 핑계로 권력을 찬탈하고 개인적 풍요를 위해 권력을 유지한 조직화된 범죄 집단”이라고 비판했다.
푸틴 대통령은 21일에는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화상회의에서 종전안을 받은 사실을 공개하며 “나는 그것이 최종 평화적 해결의 기반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평가했다. 이어 “우크라이나가 이에 반대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국들은 여전히 전장에서 러시아에 전략적 패배를 가하는 환상과 꿈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드미트리예프 특사는 같은 날 X(옛 트위터)에 “전쟁광들의 선전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 계획이 우크라이나를 더 많은 영토·인명 손실에서 구하려고 설계됐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더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5일 벨라루스 외무부와 회의를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 정신과 문서가 핵심 조항에서 제거됐다면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8월 15일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미국 알래스카 정상회담에서 약속했던 사항을 합의문에 다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리아노보스티통신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부총리는 같은 날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에너지 비즈니스 포럼에서 “우리는 석유 수출을 확대할 가능성을 중국 협력사들과 논의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방 국가에 에너지를 팔겠다는 언급이었다.
‘패싱’ 유럽은 안절부절…가능성 낮은 연내 타결 추진 속 국제 유가만 ‘롤러코스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습도 그대로 진행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25일에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공습해 최소 2곳의 아파트 빌딩에서 화재를 일으키고 4명을 다치게 했다. CNN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날 드론뿐 아니라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로도 키이우와 에너지 시설을 공격했다.
자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협정에 또 다시 ‘패싱’ 당한 유럽은 안절부절못하는 분위기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외교장관 회의를 앞두고 “한쪽에는 침략자, 다른 한쪽에는 피해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며 “그런데 우리는 러시아가 양보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독일·프랑스·스페인·폴란드·덴마크 외교장관들도 “유럽의 관여 없는 논의는 안 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UN 사무총장도 21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요하네스버그 나스렉 구역 엑스포센터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지지하는 UN 총회 결의를 준수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22일 같은 행사에서 동결된 러시아 자산 가운데 1000억 달러를 우크라이나 재건·투자 사업에 쓰고 수익의 50%를 미국이 가져가기로 한 종전안 내용에 관해 “동결된 자산은 유럽인이 보유하고 있다”고 견제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도 같은 날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패하면 유럽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역시 23일 X에 글을 올리고 “국경은 무력으로 변경될 수 없고 우크라이나의 군대에 대한 제한은 있을 수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종전안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마크롱 대통령은 25일에도 ‘의지의 연합’ 화상회의를 마친 뒤 “러시아에 휴전 의지가 없어 보인다”며 동결 자산, 안전보장군 등으로 러시아를 더 압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지의 연합은 프랑스·독일 등 20여 개국이 주축이 돼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 방안을 논의하는 협의체다.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국제 유가도 연일 춤을 추고 있다. 18일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된 탓에 60.74달러로 올랐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19일부터 내리 하락세를 보이며 25일 57.95달러까지 떨어졌다. 이는 지난달 21일 이후 한 달 만에 가장 낮은 가격이다. 우크라이나 종전 기대는 이날 뉴욕 3대 증시가 모두 상승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시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종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위기에 몰린 젤렌스키 대통령이 영토 조항까지 포함된 합의안을 들고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지방 선거 완패, 억만장자 성착취범 고(故) 제프리 엡스타인 연루설, 생활물가 상승, 연방대법원 상호관세 재판 불확실성 등으로 공화당조차 장악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동력도 문제다. 무엇보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되는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가 조금이라도 양보해야 하는 수정안에 굳이 도장을 찍으려 할는지가 의문이다. 당분간은 종전 가능성만 따지면서 유가와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할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시장·기업·정책·정치·외교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ykh22@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