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미제로 남아 있던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확인됐다. 오랜 기간 범인의 실마리를 파악하지 못한 탓에 그 정체를 두고 다양한 추측이 나왔지만 DNA 감식 결과 범인의 정체는 피해자들이 찾은 빌딩의 관리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10년 전 이미 사망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23만 명을 수사 대상자로 선정하고 1570명의 DNA를 대조하는 등 범인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신정동 연쇄 살인, 그리고 1명의 생존자
사건은 2005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발생했다. 2005년 6월과 11월 신정동 주택가에서 20대 A 씨·40대 여성 B 씨의 시신이 연달아 발견됐다. 이 여성들은 모두 마대자루와 쌀 포대에 씌워진 채 특이한 형태의 끈으로 묶여 발견됐다. 사건을 처음 담당한 양천경찰서는 강력계 6개 반을 전부 투입하고 이후 전담수사팀 38명을 구성해 현장 증거물을 감식하고 유전자를 감정하는 등 8년 간 수사를 진행했지만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이 때 경찰은 A 씨가 가족들에게 “감기 기운이 있어 병원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점에 착안해 인근 병·의원과 약국을 탐문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2006년 신정동 일대에서 여성 C 씨가 납치당했다 풀려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한 차례 전환점을 맞았다. 2015년 C 씨는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2006년 5월 신정역 인근에서 흉기를 든 남성에게 납치당한 뒤 신정동 주택가의 반지하로 끌려갔다”면서 “범인이 한 눈 판 사이 도망친 윗집 신발장에 ‘엽기토끼’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해당 사건이 2005년 연쇄 살인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까닭에 동일범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방송이 방영된 이후로도 10년 동안 숱한 의혹과 추측이 이어졌지만 범인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단서는 슬라이드에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진전은 있었다. 2016년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 미제전담팀이 신설돼 수사 기록과 증거물을 인수했고, 2020년 유전자 분석 기법의 발전으로 2005년 1·2차 신정동 살인사건 증거물이 모두 동일범의 소행임이 확인됐다. 2005년 당시에는 기술의 한계로 검출되지 않았던 DNA가 A 씨의 속옷과 B 씨의 시신을 묶은 노끈에서 발견된 것이다.
동일범이 저지른 범행임을 확인한 경찰은 현장을 수백 회 이상 탐문하고 2005년 서울 서남권 공사 현장 관계자와 신정동 전출입자 등 23만 1897명을 수사 대상에 올렸다. 이 중 우선순위를 정해 전국에 흩어진 1514명의 유전자를 채취해 증거물과 대조했다. 외국인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중국 등 국가 데이터베이스도 대조하는 등 국제 공조 수사도 펼쳤다.
이 같은 강도 높은 수사에도 신원이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경찰은 범인이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된다. 경찰은 살인·성폭행 등 강력 범죄 전과 3회 이상, 독립공간에서 혼자 일하는 직업, 신정동 거주자 등의 요건을 갖춘 사망자 56명을 추려 수사 대상에 올렸다. 특히 경찰은 양천경찰서에 있던 ‘현행범 체포 바인더’ 중 2006년 강간치상 혐의로 한 남성이 체포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동일 수법의 전과자이자 2005년 신정동의 Y 빌딩 관리인으로 일했던 남성 장 모 씨(당시 60대 초반)가 유력 용의자로 특정된 순간이었다.
문제는 장 씨가 이미 사망했다는 점이다. 장 씨는 2006년 2월 Y 빌딩을 찾은 피해자에게 ‘빌딩 문이 잠겨 있다’면서 지하로 끌고 가 납치하려다 현행범으로 체포돼 3년 간 복역했고 2009년 출소했다. 장 씨는 2015년 7월 암으로 사망해 수 년이 지나 증거물에 담긴 유전자와 대조할 유전자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경찰은 사망 전 장 씨의 행적을 추적하고 경기 시흥·광명 등 병원 40곳을 수색한 끝에 파라핀 블럭(조직 검사 과정에서 채취한 표본을 파라핀에 넣어 굳힌 것) 5점과 조직 슬라이드(조직 검사에서 채취한 표본을 현미경으로 보기 위해 유리판에 특수 처리한 것) 12점을 확보했다. 신원 확인에는 행운도 작용했다. 보통 슬라이드가 파라핀보다 크기가 작지만, 결국 장 씨의 DNA가 확인된 것은 슬라이드였다고 한다. 장 씨의 사망 후 10년이 지난 까닭에 검체의 보관기한 또한 한참 경과된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병원은 조직을 보관하고 있었다.
DNA를 확인한 경찰은 장 씨가 일한 Y 빌딩의 환경과 시신에서 발견된 곰팡이가 발생하는 환경이 유사하다는 점을 파악했다. 특이한 점으로 꼽혔던 시신을 묶은 끈 형태도 장 씨가 과거 근무했던 군 수사 부서에서 학습한 것으로 추정됐다. 장 씨는 교도소 복역 당시 재소자에게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다”는 말도 전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여전히 미제로 남은 ‘엽기토끼 사건’…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
장 씨를 특정한 후 경찰이 재구성한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2005년 6월 6일 Y 빌딩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던 장 씨는 Y 빌딩 내 병원을 방문했지만 문이 닫혀 있자 귀가하던 A 씨를 붙잡아 지하 1층 창고로 끌고간 뒤 금품을 갈취하고 살해했다. 시신을 노끈으로 묶은 장 씨는 밤 10시께 시신을 GM대우 라세티에 싣고 초등학교 노상주차장에 유기했다. 2005년 11월 20일엔 Y 빌딩에 방문한 B 씨를 같은 수법으로 지하 1층으로 끌고 가 수 차례 폭행, 휴대전화를 빼앗고 성폭행한 뒤 나일론 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장 씨는 시신을 비닐과 돗자리로 감싸 나일론 끈으로 결박한 뒤 이튿날 새벽 1~2시께 라세티로 운반해 신정동 주택가 노상주차장에 유기했다.
범인이 20년 만에 밝혀졌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가해자인 장 씨가 사망해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불송치될 예정인 데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됐던 ‘엽기토끼 사건’도 장 씨가 현행범 체포된 지 3개월 뒤에 발생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도로 미궁 속에 놓이게 됐다. 또 사건 직후 초기 수사 단계에서 경찰이 범행 장소였던 Y빌딩을 탐문하고도 특이사항을 찾지 못한 점도 안타까움을 안긴다.
신재문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 팀장은 “앞으로도 경찰은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인범은 저승까지 추적한다는 각오로 장기미제 사건의 진실을 범인의 생사와 관계없이 끝까지 규명하겠다”면서 “오랜 시간 경찰을 믿고 기다려주신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애도와 위로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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