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편집자주>
2023년 11월 12일. 자신이 소유한 서울 영등포의 한 빌딩 옥상에서 80대 남성이 피를 흘리며 숨진 채 발견됐다.
처음엔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보였다. 평소 자신을 무시하던 건물주에게 앙심을 품은 30대 주차관리원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인 줄 알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건은 한 사람의 분노가 아닌 ‘조종된 살인’으로 드러났다.
◇자산가 건물주와 ‘무시당했다’던 관리인=피해자 유모(80대) 씨는 서울 영등포역 인근에서 여러 채의 건물과 토지를 소유한 지역 자산가였다. 평소 "550억 원으로 대부업을 할 생각이다"라고 말하곤 했던 그는 인근 상인들과도 교류가 잦은 인물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건물은 영등포역 인근 대로변의 지하 1층·지상 5층 규모(560㎡·170평) 건물로 당시 시세는 약 120억~130억 원에 달했다.
사건 당일 오전 10시께 유 씨는 평소처럼 자신이 소유한 건물로 출근했다. 하지만 사무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유 씨 소유 주차장의 관리인이던 김모(30대) 씨였다.
김 씨는 “평소 자신을 무시해왔다”며 흉기를 들고 유 씨를 옥상으로 데려가 살해했다. 범행 후 그는 용산역에서 강릉행 KTX를 타고 도주했으나 불과 11시간 만에 강릉역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경찰은 단순한 분노범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 씨가 2급 지적장애인이라는 점, 그리고 배후에 수상한 인물이 있었다는 점이 수사의 방향을 바꿨다.
◇모텔 주인은 왜 CCTV를 지웠나=김 씨가 범행 직후 도주·은신한 곳은 사건 현장 맞은편 모텔이었다. 그 모텔의 주인은 바로 조모(40대) 씨로 주차관리원 김 씨의 고용주이기도 했다.
경찰이 도주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폐쇄회로(CC)TV를 요구하자 조 씨는 “며칠 주기로 자동 삭제된다”며 거부했다. 경찰은 설득 끝에 CCTV를 확보했지만 영상은 이미 삭제돼 있었다. 조 씨는 "영상을 삭제했다"고 시인했다.
조사 결과 조 씨는 단순한 은폐자가 아니라 살인을 교사한 인물이었다. 조 씨는 지적장애인 김 씨를 장기간 심리적으로 지배하며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도록 조종했다.
경찰은 조 씨에게 '특수교사살인죄'를 적용했다. 이는 자신이 지휘·감독하는 사람을 시켜 범행을 저지른 경우 형량이 최대 1.5배까지 가중되는 중범죄다.
◇치밀한 교사 정황…"그냥 죽여라"=경찰 수사 결과 조 씨는 사건 발생 약 5개월 전인 2023년 6월부터 김 씨에게 유 씨의 동선을 보고하게 했다.
이후 방수신발 커버, 복면, 우비, 흉기 등 범행도구를 구매하게 시켰고 같은해 9월부터는 김 씨에게 무전기를 사용하는 방법과 칼을 찌르는 연습까지 시켰다.
범행 사흘 전인 11월 9일에는 유 씨 소유 건물의 CCTV 방향을 돌리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사건 당일 조 씨는 김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옥상에서 기다렸다가 유 씨를 발견하면 녹음할 수 있으니 말을 하지 말고 그냥 죽여라. 목격자가 있으면 목격자도 죽여라."
◇돈이 비극을 만들었다=조 씨와 유 씨의 갈등은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사됐다.
조 씨는 2020년 7월 유 씨 소유 주차장 부지를 보증금 500만 원과 월세 150만 원에 임차해 모텔 운영과 주차 관리 업무를 병행했다.
하지만 그는 32개월 동안 월세를 내지 않았고 유 씨는 2023년 6월 조 씨에게 퇴거를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이어 9월에는 부동산인도소송까지 제기하며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유 씨의 유족들은 “조 씨가 지역 재개발 조합장을 하고 싶어했으나 유 씨가 반대했고 갈등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앙심을 품은 조 씨는 김 씨에게 유 씨에 대한 거짓말과 험담을 반복하며 적대심을 심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조 씨가 김 씨에게 약 3년 4개월간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김 씨의 장애인 수당까지 월세 명목으로 가로챘다는 사실이다.
경찰은 조 씨가 지적장애인인 김 씨를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해 범행을 지시했다고 판단했다.
◇법정으로 간 '건물주 살인교사'...대법원 판단만 남았다=1심 재판부는 2024년 7월 조 씨에게 징역 27년을 선고했다. "지적장애를 가진 김 씨를 절대적으로 신뢰·의지하게 만든 뒤, 험담과 이간질로 적대감을 키워 살인을 교사했다"는 이유에서다. 김 씨 역시 살인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조 씨와 검찰 모두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피고인은 자신을 친형처럼 따른 중증 지적장애인을 이용해 피해자를 잔혹하게 살해해 죄질이 극히 불량하고 피해자의 유족들이 엄벌을 탄원하고 있다"며 징역 40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2025년 1월 8일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음 날 조 씨의 변호인은 형량에 불복해 상고장을 제출했고 2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김 씨 역시 상고했다.
이제 두 사람 모두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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