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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축소판’ 일본의 성씨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임병식 순천향대학교 대우교수·국립군산대학교 특임교수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사토’ ‘스즈키’ ‘다나카’ 같은 이름을 자주 본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지만 일본의 성씨는 유독 자연과 농경, 그리고 귀족 문화의 향취가 짙다. 부부의 성이 같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 취임은 일본 성씨의 기원과 제도적 배경에 새삼 시선을 모으게 한다.

일본 성씨에는 왜 자연 지형이 많을까. 한국·중국과 달리 두 글자 성씨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또 결혼하면 같은 성씨를 갖도록 한 배경은 무엇 때문일까. 일본 여행에서 흔히 접하는 궁금함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남편 이름은 다카이치 타구(高市 拓)다. 본명은 야마모토 타쿠(山本 拓)였으나 2021년 재혼하면서 부인과 같은 성씨로 바꿨다.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일본 문화도 생소하고, 남편이 아내를 따라 성씨를 바꾸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일본 10대 성씨는 사토(佐藤), 스즈키(鈴木), 타카하시(高橋), 타나카(田中), 이토(伊藤), 와타나베(渡邊), 야마모토(山本), 나카무라(中村), 고바야시(小林), 가토(加藤)다. 밭(田)과 산(山), 나무(木), 마을(村), 다리(橋), 숲(林) 등 자연과 농촌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흔한 사토의 등(藤) 또한 등나무다. 일본 성씨가 농경문화 또는 자연과 밀접함을 알 수 있다. 또 ‘마을 가운데’(나카무라·中村), ‘나무 아래’(기시다·木下), ‘강 주변’(와타나베·渡?), ‘밭 가운데’(다나카·田中), ‘작은 샘’(고이즈미·小泉) 등 스토리텔링 요소도 보인다. 자연 친화적인 성씨와 밋밋한 일본 음식을 떠올리자면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만행을 저지른 민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일본 성씨에 자연 지형이나 농경문화가 녹아든 유래는 이렇다. 고대 씨족 사회에서 성씨는 귀족이나 무사, 제관의 전유물이었다. 후지와라(藤原), 미나모토(源本), 타이라(平) 등 엘리트 씨족만 성(姓)과 씨(氏)를 가졌다. 농민과 평민들은 마을명이나 지명에 근거해 아무렇게나 불렀다. 평민들까지 성씨를 갖게 된 건 메이지유신 직후다. 메이지 정부는 19세기 말부터 성씨를 강제했다. 세금 징수와 징병에 필요한 호적·인구조사 제도를 정비할 목적이었다. 이 때 많은 이들이 “밭 한가운데 살았다(田中)”, “다리 아래 거주했다(高橋)”, “강기슭에 살았다(渡邊)”며 주변 환경을 빌려 성씨를 만들었다. 이러니 대부분 성씨는 160년 안팎에 불과하다.

스즈키(鈴木)는 제관 가문에서 유래한 성씨다. 방울(鈴)은 제사를 지낼 때 필수 도구였다. 후지(藤)가 들어간 성씨는 유독 많은데 사토(佐藤), 이토(伊藤), 가토(加藤), 사이토(斎藤), 엔도(遠藤),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방계임을 암시한다. 후지와라는 일본 고대·중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보랏빛 등꽃이 핀 넓은 들(고귀함과 평온함이 공존)’을 뜻하는 이름부터 럭셔리하다. 후지와라 가문과 후손들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8~12세기) ‘섭정’과 ‘관백’ 직위를 독점하며 천황가 외척으로서 군림했다. 일본 정치에서 귀족 독점 체제는 후지와라 가문에서 시작됐다.



자연 지형과 생활환경, 귀족·무사 계통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일본의 성씨는 사회 구조와 역사,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이 응축된 결과다. ‘돕는다(佐)’와 ‘등나무(藤)’를 결합한 사토는 귀족의 위세가 평민 사회로 스며든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분 질서가 무너질 때 가장 많이 생긴 성씨가 ‘김(金)·이(李)·박(朴)’이다. 이들 성씨에 왕족과 사대부가 많았기에 하층민들은 ‘김·이·박’ 족보를 사들여 신분 변화를 꾀했다. 무사 계통 미나모토(源)와 타이라(平), 조정 귀족인 타치바나(橘)도 4대 씨족으로 꼽는다. 여기에서 파생된 성씨가 퍼지면서 일본의 지명과 문화, 지역 정체성을 형성했다. 예컨대 미나모토씨에서 아시카가(足利) 가문, 타이라씨에서 히라노(平野) 가문이 나왔다. 두 가문은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막부를 지탱한 핵심 세력이었다.

일본에서 부부가 같은 성씨를 쓰는 독특한 제도는 민법 750조에 근거한다. 법은 “부부는 혼인 시 동의한 성씨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결혼한 부부의 95%가 남편 성씨를 따르고 있다. 결혼해도 각자 성씨를 유지하는 우리와 다르다. 제도가 만들어진 배경 역시 흥미롭다. 메이지 정부는 호적 제도와 가족 단위 존속·상속을 중시했다. 가족이 단일 성씨를 공유하면 행정상·재산상·세제상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부부동성’은 근래에 개인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제약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각자 성씨를 유지해야 한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다카이치 총리 부부는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이는 일본에서 성씨 제도와 젠더·사회 인식 변화가 교차점에 있음을 상징하는 사례다.

지역마다 다른 성씨가 분포하는 것도 특이하다. 홋카이도는 사토와 사사키, 간사이는 나카무라와 야마다, 규슈는 마에다와 마쓰오가 흔하다. 사회 구조 변화에 기인한 결과다. 사토와 스즈키가 귀족 혈통을, 다나카와 나카무라가 농민과 평민을 상징한다면 이는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다. 일본은 귀족 피가 섞인 사토와 신사 제관의 후손 스즈키, 평민 다나카가 공존하는 나라다. 그 안에는 신분과 계층, 종교와 문화가 녹아 있다. 이름 하나에도 천년의 역사가 스민 나라, 이것이 일본이다. 어쩌면 일본을 이해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열쇠는 ‘이름’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고귀한 땅에서 일찍 싹튼 생명’이다. 이름처럼 한일관계에 좋은 싹이 틀지 기대해 본다.

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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