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를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다. 제도가 지닌 철학과 가치만 떼어놓고 보면 지지할 수 있지만 대입과 같은 현실과 묶어서 보면 반대도 가능하다. 그만큼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존재하는 묘한 제도다.
일각에서는 고교학점제가 사교육을 늘렸고 자퇴생을 증가시켰으며 교사들의 다과목 부담을 키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교학점제에 따라 고1은 공통 교육과정 중심으로 운영되기에 과목 선택권이 거의 없다. 시행 1학기 만에 고교학점제로 인해 사교육비와 자퇴생이 증폭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이는 정시 확대 등에 기반한 대입 제도나 기존 공교육 체제의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다. 모든 문제를 기·승·전·고교학점제 탓으로 돌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고교학점제는 어느 날 갑자기 나온 정책이 아니다. 1957년도에도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고교학점제를 고민했던 기록이 있다. 고등학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와 다른 속성을 갖는다. 고1까지는 보편성을 기반으로 공통 교육과정을 운영하지만 대학 진학이나 사회생활을 준비해야 할 2·3학년 시기에는 진로와 적성을 고려한 과목 선택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강점 영역과 관심 분야가 다르다. 고교학점제는 이를 반영해 고교 2·3학년 때 최소한 몇 과목이라도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일례로 갈매고의 교육과정을 보면 수능 대비를 위한 필수 이수 과목뿐 아니라 연극·인공지능기초·문학감상비평·세계문화와영어·텃밭가꾸기·논술과 같은 과목도 들을 수 있다. 배움이 느린 학생들도 진로와 적성·수준을 고려해 능동적으로 공부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고교학점제 도입 이후 선생님들의 헌신과 지원 덕분에 학업 성취율과 출석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들이 당초 3만 2414명(7.7%)에서 2489명(0.6%)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육과정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여러 사정에 의해 학교 출석도 버거운 학생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그동안 학교는 상위권 학생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했고 변별력 있는 문제 출제에 적지 않은 에너지를 쏟으면서 상대적으로 배움이 느린 학생들에게는 덜 주목했다.
이제 상위권 학생 중심 담론에서 ‘느린 학습자’ 담론으로 변화할 시점이다. 고교학점제는 ‘느린 학습자’ 내지는 ‘학습 휴면’ 상태에 있는 학생들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그 담론의 출발점이 됐다. 이미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교육부는 최근 기초학력 보장 강화, 교원 증원과 최소 성취 수준 보장 지도 운영 유연화, 지역과 학교별 격차 해소, 미이수 학생을 위한 학점 추가 이수 방안 수립 등을 제안한 상황이다. 교육청 차원에서도 고교학점제 지원 센터를 통해 학교의 어려움을 해소해야 한다.
고교학점제 학점 이수 기준은 국가교육위원회에서 곧 논의하게 된다. 만약 학업 성취율을 학점제 이수 기준에서 제외하고 출석률 기준으로 학점을 부여하면 이를 진정한 학점제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내신 절대평가로 나아가자고 하면서 과목별 성취 기준을 없애자는 것도 양립하기 어렵다. 부디 이재명 정부에서는 고교학점제를 잘 챙겨서 고교학점제 2.0으로 진화·발전시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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