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사엔 가끔 ‘(웃음)’이라고 표시할 때가 있다. 답변할 때 실제로 큰 웃음이 터졌거나 누가 들어도 농담조일 때 그렇게 표시한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자매 선수인 고지우·고지원의 인터뷰엔 ‘(웃음)’을 넣지 않기로 했다. 거의 모든 답변에 웃음이 섞였기 때문에.
실제로 자매와 그들의 온 가족은 올해 웃을 일밖에 없을 것 같다. 자매 선수가 KLPGA 투어 한 시즌에 모두 우승한 사례는 이들 ‘제주 고씨 자매’가 역사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두 살 위 언니가 6월 말 맥콜·모나 용평 오픈에서 투어 통산 3승째를 거뒀고 동생은 8월 제주삼다수 마스터스에서 데뷔 첫 승의 감격을 누렸다. 지난 한 해 부진에 반쪽짜리 시드를 갖고 악전고투하던 동생을 말없이 응원해왔던 언니는 동생의 우승에 눈물을 멈출 줄 몰랐다.
혹자는 말한다. 자매가 정규 투어에서 같이 뛰는 건 사법고시 동반 패스와 동급이라고. 우승마저 둘 다 해냈으니 이번엔 어떤 비유를 끌어와야 할까.
기사 안에 서로 쏘아붙이듯 한 말투도 사실은 ‘(웃음)’과 함께였다. 둘이서 독하게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몰아붙이며 꿈을 향해 달리던 그때를 떠올리며 자매는 까르르 웃다가, 장난스럽게 정색하다가, 때로 진지하게 부모님 이야기도 들려줬다.
‘자매 우승’ 후 같이 인터뷰에 나선 소감은?
지우: “(동생이 있어서) 좀 낯간지러운데…. 꿈 같다고 할까요?”
지원: “적당히 솔직하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좋은 일이다. 정말 좋은 일이다’ 싶죠. 근데 언니 말대로 좀 낯간지럽긴 해요.”
예능 토크쇼 ‘유퀴즈’에서 섭외 연락은 없었나요?
지우: “설마요. 전혀 없었습니다.”
지원: “목표로 잡겠습니다. 유퀴즈 출연!”
동생의 우승으로 자매 우승이 완성됐던 순간을 돌아본다면.
지우: “전 완전 눈물바다였어요. 너무 대견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울컥했고 그때부터 계속 눈물이었죠.”
지원: “언니가 원래 눈물이 많고 전 없거든요. 그걸 알고 있는데도 언니가 너무 많이 울고 있어서 그 모습을 보니 전 너무 웃긴 나머지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어요. 다음에 언니 우승할 땐 저도 울어주려고요.”
고향 제주에서 첫 우승이라 더 뜻깊었겠어요.
지원: “진짜 반응 좋았죠. 대회 내내 응원이 장난 아니었어요. 같은 조 선수들이 ‘핫한’ 언니들이었는데 그 언니들한테 향하는 응원 못지않게 뜨거운 응원을 받았죠. 그래서 더 기죽지 않고 제 플레이를 할 수 있었어요. 어릴 때 살던 동네가 중문인데 그쪽에 플래카드도 많이 걸렸고요.”
이제 고지우·고지원 자매를 얘기할 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의 안니카·샤를로타 소렌스탐, 제시카·넬리 코르다 등 자매 챔피언들이 언급돼요.
지원: “소렌스탐 선수와 같이 이름이 불린다는 거 자체가 영광이에요. 롤모델이기도 했으니. 또 코르다 자매처럼 앞으로 그런 길을 걷고도 싶어요.”
둘이 챔피언 조에서 우승 다툼을 하면 누가 이겨야 할까요? 마지막 18번 홀 퍼트로 우승과 준우승이 갈리는 그림도 나올 수 있지 않을지.
지원: “아무래도 언니한테 승수에서 밀리는 제가 우승해야 하지 않을까요? 근데 각자 다 간절한 거니까 음….”
지우: “마지막 홀 퍼트는 정말 멘탈 싸움일 거예요. 어릴 땐 제가 항상 이기긴 했지만.”
지원: “안 이기면 분을 못 이기는 스타일이었잖아.”
지우: “내가 좀 그렇긴 했지.”
서로의 골프를 평가하며 장단점을 꼽는다면.
지우: “지원이의 장점은 흔들리지 않는 거? 하루 못 쳐도 절대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아요. 체구가 작은데 정말 야무지게 잘 치기도 하고요.”
지원: “그럼 단점은?”
지우: “단점? 음, 뭔가 임팩트가 없다는 거 아닐까?”
지원: “좋아, 그렇게 나온단 거지? 언니의 단점은요 감정 기복이 심하다? 그리고 장점은 버디를 많이 잡는 거랑 비거리죠.”
각자 들어본 장단점, 다 인정하나요?
지원: “루키 때 언니 경기를 갤러리로 따라다니며 정말 많이 봤어요. 돌부처 스타일과 감정이 드러나는 스타일 중에서 언니는 후자이긴 해요. 하지만 그건 언니의 스타일이에요. 고쳐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아, 아까 들은 ‘임팩트’가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데, 앞으로 선수로서 목표가 뭐냐고 묻는다면 임팩트 있는 선수가 되는 게 목표라고 말하면 될 것 같습니다.”
대개 형제·자매가 어릴 때 많이 싸우죠. 둘은 어떤 자매인가요?
지우: “엄청 많이 싸우면서 컸죠. 근데 투닥투닥하면서도 끈끈한? 그런 사이라고 할까요?”
지원: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늘 둘이 붙어 다녔어요.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추억이 너무 많아요.”
연습장 다닐 때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했다면서요.
지우: “세 번씩 갈아타는 생활을 초중고 때까지 쭉 했어요. 골프백 메고 버스 탄 적도 많고요.”
지원: “돌아보면 그때 자연스럽게 체력 훈련이 됐던 거 같아요.”
지우: “정말 그래요. 학교 끝나자마자 버스 타고 내리면 몇 분 안에 거의 3㎞를 전력 질주해야 다음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탈 수 있었어요. 그거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하니까 죽기 살기로 뛰었죠. 그 시간에 그걸 타야만 연습장에 늦지 않고 갈 수 있었어요. 지원이 손잡고 거의 끌고 가다시피 뛰는 생활을 꽤 오래 했어요.”
지원: “맞아요. 원래 연습하던 곳이 중간에 없어지는 바람에 멀리까지 연습장을 가야 했어요. 저는 그냥 다음 버스 타자 할 때도 있는데 언니는 절대 안 된다면서 제 손 붙잡고 엄청 뛰었죠. 덕분에 그 버스 한 번도 놓친 적 없어요.”
언니 역할이 컸겠어요.
지원: “언니는 멀리 훈련 가거나 하면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진지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어요. 저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하는 편인데 언니는 확실히 달랐어요.”
지우: “어렸지만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컸어요. 그러려면 미친 듯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었고요. 남들 10시간 하면 우린 20시간 해야 한단 생각이었죠.”
지원: “호주로 훈련 갔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홈스테이하면서 맨날 36홀씩 돌고 어프로치, 퍼트 연습 하고. 종일 골프만 하는 생활이었는데 언니는 제가 잠깐 쉬고 있을 때도 이러고 있을 때 아니라고 일으켰어요. 1분도 가만두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때 언니가 고1 때였죠. 휴대폰도 못 만지게 했어요.”
지우: “호주는 해가 엄청 일찍 뜨고 저녁엔 잘 지지 않더라고요. 지원이 앉혀 놓고 거의 2시간을 ‘정신 교육’했던 날도 떠올라요.”
맞벌이하던 부모님에게 야속한 감정을 느낀 적도 있었겠어요.
지원: “각자 다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건 없었던 거 같아요.”
지우: “맞아요. 각자 다 바빴고 열심히 살았어요. 엄마는 중고등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고 아빠는 합기도장을 하시다가 양식장 하러 완도로 가셔서 기러기 아빠였어요. 엄마가 저희에 남동생까지 3명 케어하느라 고생 많으셨죠.”
지원: “지금 생각해도 엄마 아빠 진짜 대단하다.”
지우: “가끔 ‘내가 엄마였으면 진짜 힘들었겠다’ 이런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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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은 축구 선수라고.
지우: “필관이요? FC서울 유스팀에 있어요. 중앙 미드필더 맡아요. 경기 ‘직관’하는데 괜스레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원: “셋이서 애틋해요. 셋 중에선 필관이가 제일 웃기는 캐릭터예요.”
둘은 어릴 때 육상도 했다고 들었어요.
지우: “저는 중거리 달리기랑 멀리뛰기요. 그거 아니어도 저흰 그냥 일상이 뛰는 거였어요.”
지원: “저는 단거리요. 잡기 놀이처럼 맨날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게 저희였어요. 그래서인지 둘 다 달리기가 빨라요.”
골프로 내기도 많이 했겠죠?
지우: “매일이 내기였죠.”
지원: “대회 같이 나가면 라운드별로 못 친 사람이 밥 사기.”
쓰는 클럽도 비슷하더라고요.
지우: “둘 다 4번 아이언부터 쓰고 웨지는 48·52·58도 써요. 아이언 브랜드는 같지만 모델은 다르고요.”
같은 교습가한테서 배우나요?
지우: “저는 권기택 프로님. 시즌 전 겨울 훈련은 뉴질랜드로 다녀왔어요.”
지원: “저는 삼천리 골프단의 김해림 프로님이랑 지유진 부단장님한테 배워요. (2부 투어인) 드림 투어 대회가 해외에 있어서 거기 다녀온 뒤론 국내에서 훈련했어요.”
고지우 선수는 훗날 미국 무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지원 선수는 일본 투어 프로 테스트도 쳤죠. 일본 진출이 목표인가요?
지원: “저는 유럽도 뛰고 싶고 여러 곳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렇지만 어쨌든 최고 무대는 미국인 거니까 언젠가 도전할 거란 마음은 있어요. ‘100% 준비가 됐을 때 가겠다’ 이런 건 아니에요. 기회가 오면 일단 부딪쳐보고 채워야 할 것들은 진출하고서 하나씩 해나가도 될 거란 생각이에요.”
골프 외에 즐기는 건 비슷한 편인가요?
지원: “전 K팝이면 다 좋아해요. 연예계 관심이 많고 문화생활 즐기는 게 너무 좋아요.”
지우: “저도 지원이처럼 그런 걸 좀 즐기고 싶은데 시도조차 안 되는 거 같아요. 관심사가 사실 골프 말곤 없어요. 저도 이런 제가 좋진 않죠.”
지원: “언니는 정말 골프랑 운동, 딱 이것뿐이에요. 뭐랄까 ‘K장녀’ 마인드가 탑재돼있는 거 같아요. 훈련 가면 제 머리까지 감겨줬다니까요.”
지우: “엄마 아빠 힘들고 바쁘니까 아껴야 한다면서 뭐 하나 사 먹지도 못하게 했어요.”
부모님은 당연히 두 딸을 똑같이 응원하겠지만 은연 중에 어느 한쪽으로 응원이 기운다는 느낌은 없나요? ‘엄마는 언니, 아빠는 동생’ 이런 식으로요.
지우: “아빠는 잘 치는 딸을 더 좋아하는 느낌? 농담이고요. 정말 두 분 다 저흴 똑같이 응원해주셔요.”
지원: “저는 언니가 먼저 잘 돼서 좋은 거 같아요. 엄마 입장에선 언니가 좋은 본보기가 돼야 동생들이 따라간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언니가 먼저 우승하고 잘 돼서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잘 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부모님이나 친척한테 물려받은 골프나 운동 DNA가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지우: “선수 출신이나 그런 건 아니지만 아빠가 싱글 골퍼예요. 같이 라운드 해보면 확실히 감각이 있어요. 친척 분들 중엔 운동과 관련 있는 분은 전혀 없고요.”
지원: “엄마는 힘이 세고 운동신경이 있으세요. 초등학생 때 육상도 했다고 하고요. 근데 이렇게 어느 정도 재능을 물려받았다 해도 이게 제일 힘든 상황이었지 않나 싶어요. 뭔가 타고난 것도 같은데 엄청나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매 우승이 나온 뒤로 달라진 건 뭐가 있을까요?
지우: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오히려 커졌어요.”
자매를 부르는 딱 떨어지는 이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지우: “다들 간단하게 ‘고자매’라고 부르긴 해요.”
지원: “언니 별명이 ‘버디 폭격기’니까 저도 그쪽으로 따라가서 ‘폭격기 자매’ 좋지 않아요?”
지우: “좋다, 좋다! 폭격기 자매!”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고지우
출생: 2002년 | 정규 투어 데뷔: 2022년 | 소속: 삼천리
주요 경력:
2025년 맥콜·모나 용평 오픈 우승, 블루캐니언 레이디스 챔피언십 2위
2024년 하이원리조트 여자오픈 우승
2023년 맥콜·모나 용평 오픈 우승
2022년 롯데 오픈 4위, 셀트리온 퀸즈 마스터즈 5위
2021년 큐캐피탈 드림투어 왕중왕전 2위
고지원
출생: 2004년 | 정규 투어 데뷔: 2023년 | 소속: 삼천리
주요 경력:
2025년 제주삼다수 마스터스 우승, 오로라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 공동 2위
2024년 S-OIL 챔피언십 16위
2023년 E1 채리티 오픈 11위
2022년 백제CC·XGOLF 점프투어 3차전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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