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아시아태평양 21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주요 다자 외교의 장이다. 21개 회원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총합은 전 세계의 약 60%, 무역량은 약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한국, 호주, 캐나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국가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APEC은 말 그대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기술·환경 협력을 이끄는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내일’이며 인공지능(AI), 반도체, 공급망, 탄소 중립 등 미래 경제를 이끌 핵심 의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다. 이들 의제는 향후 글로벌 질서를 좌우할 만큼 중대한 현안이고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의 관심은 APEC 정상회의의 공식 의제보다 이를 계기로 열릴 미중 정상회담에 집중되고 있다. 현재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가장 큰 변수는 미중 ‘경제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에서 일정 수준의 절충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양국 간 갈등은 통제 불가능한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한미 정상회담 역시 비상한 관심사다. 3500억 달러(약 50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성격을 둘러싸고 양국 간 이견이 여전한 가운데 이번 회담에서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 최악의 시나리오인 ‘노딜’로 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손실을 넘어 한국의 외교·안보 전반에 복합적인 충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최근 이뤄진 중국의 한화오션 제재는 ‘제2의 사드 보복’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 조치에는 경제적 강압을 통해 한국의 대미 협력에 견제구를 던지려는 의도가 엿보이는데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이와 관련해 과연 어떤 메시지가 나올지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미북 정상회담의 성사 여부도 주목할 변수다. 미국 CNN 방송은 18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 미북 정상 회동이 비공개로 논의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트럼프가 결심한다면 회담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며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의 회동 시나리오를 직접 거론했다.
언론에서는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재명 대통령의 ‘가교 외교’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우선은 미중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다. 미국과 중국이 희토류 수출통제와 관세 등 민감한 이슈를 조율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면서 이 대통령이 ‘가교국 정상’으로서 일정 역할을 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중은 철저히 자국의 전략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초강대국이다. 이들이 세계 패권을 놓고 정면 충돌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과연 어떤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냉정하게 따져볼 문제다.
다음은 북미 대화의 촉진자 역할이다.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외교 행보를 보면 중국·러시아와의 연대 외교에 집중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정치적 이벤트’로 활용할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페이스 메이킹’의 공간은 상당히 좁아 보인다.
지금은 한미와 한중 정상회담 준비에 총력을 기울여 도전 받고 있는 한국의 핵심 국익을 지켜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동시에 APEC을 통한 다자 외교의 성과도 놓쳐서는 안 된다. 올해 의장국인 한국은 단순히 회의 장소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회의의 주제와 의제를 직접 제안하고 조율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글로벌 책임 강국 외교’는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핵심 외교 슬로건 중 하나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미중 경쟁의 격화와 자국 이기주의가 팽배한 각자도생의 질서 속에서 깊은 혼란에 빠져 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한국의 ‘가교 외교’는 갈등과 분열에 지친 국가들에 협력과 상생의 비전을 제시하는 연결 고리가 돼야 한다. 가교 외교는 한국이 책임 있는 강국으로서 미래지향적 비전을 국제사회에 제시할 때 비로소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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